2024.02.23 00:53
- 2023년작입니다. 런닝타임은 대략 한 시간 사십 분. 스포일러는 마지막에 흰 글자로요.
(이 분이 우영우에 나오셨다죠. 권모술수 어쩌고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안 봐서 모릅니다. ㅋㅋ 이 작품에서 연기는 좋았어요.)
- 주인공은 김재우라는 이름의 젊은이. 집에서 혼자 자다가 일어나 짐을 챙겨 검도 국가대표 선발 캠프에 합류합니다. 그곳엔 사람 좋은 아저씨도, 까칠한 아저씨도, 절대 무적의 국내 1위 황태수도 있어요. 그런데 우리 재우군은 황태수에게 뭔가 개인적인 원한 같은 게 있어 보이구요. 그게 가벼운 게 아니라 아예 가족사의 대비극과 관련되어 보이네요. 어쨌든 본인도 최근 대회 준우승에 빛나는 라이징 실력자인지라 첫 날 대련부터 실력을 뽐내며 경쟁자들을 차례로 무찌르고 황태수와 대결하게 되는데...
(야악간 젊었을 때 2PM 장우영 느낌도 나구요. 사진들 찾아보니 평소 이미지랑은 약간 다른 캐릭터 같은데, 어쨌든 어울리는 느낌이었던 걸 보면 잘 한 거겠죠.)
- 보시다시피 정말로 '검도' 영화입니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검을 들고 액션을 하는 장면은 대련 장면 뿐이구요. 이야기 측면에서 보면 인생의 원수이자 세계관 최강자에게 도전하는 2인자의 성장 드라마... 이자 스포츠 영화죠 결국. 보다 보면 이런 류의 스포츠물에 들어가는 클리셰들이 시작부터 끝까지 주루룩 펼쳐집니다. 라이벌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넘사벽의 최강자, 주변 사람들과의 경쟁과 그 속에서 오고 가는 견제, 따뜻한 동료와 정도 나누고, 또 주인공에겐 약점이 있죠. 그걸 극복해내는 게 클라이막스의 전개겠구요. 종목 불문하고 '스포츠 영화'라면 꼭 나옴직한 요소들로 빼곡하게 채워진 진짜 그냥 스포츠 영화에요. 그러합니다만...
(공포의 최강자이자 인생의 원쑤님. 카리스마 강조 차원인지 한참 동안 이런 식으로 얼굴을 제대로 안 보여줍니다.)
- 영화는 시종일관 주인공 재우의 심리를 묘사하는 데 집중합니다. 뭐 멍 때리고 명상한단 얘기가 아니구요. ㅋㅋ 위에서 말한 '스포츠 영화의 필수 요소'들을 다 전형적으로 배치해서 전개하는 와중에 그런 요소들을 다 주인공의 심리를 묘사하고, 곤경에 빠뜨리고, 결국엔 성장을 이뤄내는 도구로 활용하는 데 전념한다는 거죠.
그런데 주인공 심리가 워낙 울분, 분노, 두려움에 가득 차 있는지라 영화가 즐겁지 않아요. 더군다나 검도는 개인 종목이고 상황은 모두가 경쟁하는 서바이벌이니까요. 영화는 차갑게 가라앉은 톤의 화면으로 배경 음악을 최소화하며 (사실 종종 나오긴 하는데 밝거나 명랑한 게 없습니다 ㅋㅋ) 조용조용하게 흘러갑니다. 스포츠 영화 치곤 좀 특이한 경우겠네요.
(감독님이 검도를 좋아하시는 건지 제가 워낙 검도에 아무 관심이 없이 살아서 그런지 검도라는 스포츠에 대한 디테일들이 많이 나오는 게 신선해서 좋았구요.)
- 근데 그게 전혀 심심하거나 늘어지지 않습니다. 화면은 차갑고 영화 속 세상은 고요하지만 주인공의 심정은 계속해서 뜨겁게 끓어 오르고 있고. 그냥 특별할 것 없는 대표 선발전 프로그램들을 통해 그런 심리를 적절하게 표현해서 보여주거든요. 예를 들어 영화 속에서 자주 반복되는 대련 장면들은 음악 같은 것 없이 그냥 선수들의 기합 소리와 발소리, 목검 부딪히는 소리들로만 전개되지만 적절한 클로즈업과 중간중간 삽입되는 사람들 반응샷, 그리고 재우의 마음 속을 보여주는 적절한 연출들로 채워져서 긴장감과 박진감이 넘칩니다. 대련이나 훈련이 없는 장면에선 재우의 그 트라우마 사연을 조금씩 풀어내면서 관객들 호기심을 자극함과 동시에 재우의 좀 납득하기 힘든 (사실 이 캐릭터, 겉만 보면 꽤 진상입니다 ㅋㅋ) 심정을 이해하고 이입하게 해 주고요.
- 결국 최종적으로 밝혀지는 사연은 뭐랄까... 별 거 없어요. 아니 되게 비극적이고 드라마틱한 이야기인데, 그게 워낙 이 장르 클리셰 범벅이라서 말이죠. ㅋㅋ 근데 영화가 워낙 사실적인 톤으로 재우의 심리와 상황을 빌드업 해주기 때문에. 그리고 대표 선발전에서 재우가 처하는 상황들과 그 과거 사연들을 적절하게 엮어서 보여주기 때문에 그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사연에 충분히 이입이 됩니다. 제가 어지간해선 진상 부리는 주인공은 싫어하는 편인데, 얘는 보다 보면 참 딱하고 또 뭐 그럴 만도 하네... 라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구요. 주인공의 심리가 핵심이 되는 이야기이고, 그걸 참 잘 풀어냈습니다. 이해도 되고 공감도 되면서 또 지루하지 않게요.
캐릭터 묘사 쪽도 마찬가집니다. 어차피 다 클리셰, 기능성 캐릭터들이죠. 주인공에게 유난히 성질 부리는 경쟁자, 쓸 데 없을 정도로 잘 챙겨주는 사람 좋은 경쟁자, 시크하지만 열정적, 유능하며 은근 따뜻한 영상 분석가, 엄격한 코치, 주인공 개인사를 알고 은밀히 조언해주는 감독님... 등. 일본 열혈 스포츠물에 등장시켜도 똑같이 행동할 법한 캐릭터들이 우글우글인데 그걸 현실적인 분위기로 잘 다듬어서 보여줘요. 그래서 처음엔 다들 삭막해 보이지만 다들 알고 보면 매력적이고 그렇습니다. ㅋㅋ
(뭔가 찌질 빌런일 것처럼 등장해선 부처님 포스를 보여주는 이 캐릭터도 좋았고)
(평범한 척 현실적인 척 볼수록 예쁘신 영상 분석관님 역시 캐릭터 좋았습니다.)
- 뭐 더 길게 말할 건 없겠구요.
옛날에 흔히 보던 열혈 스포츠물(다만 좀 우울한 사연이 있는?)의 이야기 틀과 소재들을 그대로 가져다가 전혀 다른 톤으로 그려낸 작품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톤은 차갑고 조용하고 현실적이지만 인물들의 사연은 드라마틱하고 심리는 뜨겁다... 라는 컨셉을 아주 잘 살려내서 스포츠물 유치해서 싫다는 분들도 재밌게 보실 수 있을 듯.
그리고 그 와중에 대련 장면은 정말 박진감이 넘쳐요. ㅋㅋ 관객들 알아 보기 쉽게 편집도 잘 되어 있구요.
그냥 스포츠물로 봐도, 스포츠물을 빙자한 성장물로 봐도 어느 쪽으로든 고퀄의 수작입니다. 관심 가시면 한 번 보시는 쪽으로 추천해드립니다.
(박진감 넘치는 시합 연출도 좋구요. 물론 실제 대련 장면은 다 대역을 썼다는데 종목 특성상 대역들이 연기하기 편했겠어요. 찍기도 쉽고. ㅋㅋㅋ)
+ 근데 아무리 현실적으로 톤을 다운했다 해도 주인공 아빠는 정말 너무 빌런인 것... 주변 인물들 대사로 이해의 단초 같은 걸 제공해주긴 하지만 전 납득이 안 되더라구요. 이건 뭐 통키 아빠도 아닌데... ㅋㅋㅋㅋㅋ
++ 그러고보면 시커먼 남자들만 우루루 나와서 내내 고함지르며 싸우고 땀 튀기는 이야긴데 희한할 정도로 부담스런 느낌 전혀 없이 담백했네요.
+++ 스포일러 구간입니다. 이번엔 요약식으로 최대한 간단하게.
그러니까 주인공 김재우씨의 트라우마 가정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 분이 초딩이던 시절에 형이 죽었어요. 친구와 싸움을 하다가 죽었다는데 그 친구놈은 촉법 소년일 뿐더러 싸움 중 과실로 뭐뭐... 해서 감옥도 안 가고 빠져 나갔구요. 아끼던 자식의 죽음으로 부모가 다 넋이 나갔는데 그 와중에 아버지가 갑자기 사라집니다. 엄마는 행방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는데 김재우씨에게 알려주진 않았구요. 결국 스스로 발품 팔고 정보 수집해서 찾아낸 아빠는 글쎄... 우리 형아를 죽인 그 놈에게 검도를 가르치고 있었던 겁니다. (검도 사범이었습니다. 선수로도 꽤 잘 했던 듯한 뉘앙스구요.) 배신감에 몸을 떨던 재우씨는 아빠에게 돌을 던지며 '절대로 돌아오지 마!'라고 외쳤고. 이후로 정말로 아빠는 집에 돌아오지 않은 채 소식이 끊겼고 엄마는 혼자서 생활고 감당하느라 밤 근무 새벽 근무 뛰며 몸이 부서져라 일 하구요. 우리 김재우씨는 아빠에 대한 배신감과 형아의 원수에 대한 분노로 검도를 시작하여 여기까지 온 것인데... 당연히 도입부에 입소한 국가대표 선발 과정의 부동의 원탑 에이스가 바로 그 원수. 황태수입니다.
검도 실력 자체는 꽤 훌륭하지만 분노와 복수라는 감정에 휘둘리는 김재우씨가 황태수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게다가 이 놈은 자꾸만 겸손하고 성격 좋은 매너남처럼 행동하구요. 그 꼴을 보며 점점 더 부아가 치미는 김재우씨지만 그러면 그럴 수록 황태수를 이길 길은 요원해지고 자기 몸만 망가지겠죠. 그래서 "넌 공격할 때 오른 손이 긴장해서 힘이 너무 들어가 속도도 느려지고 상대방에게 다 읽히는구나" 라는 지적을 영상 분석 요원에게 받지만... "사실 이거 황태수 선수가 얘기해준 것이기도 해요." 라는 말 때문에 빡쳐서 죄 없는 분석 요원님에게 들이 받고 계속 폭주하는 김재우씨입니다.
그 와중에 마치 동네 아저씨 같은 인상의 2인조와 얽히는데요. 그 중 까칠하고 승부욕에 불타는 아저씨랑은 척을 지고 안 좋은 관계가 되고. 넉살 좋고 사람 좋고 정말 포용력 쩌는 아저씨 한 명이랑은 그나마 잘 지냅니다. 사실 그쪽이 일방적으로 김재우씨를 돌봐주는 거고, 김재우씨는 계속 자기 원수! 복수!! 내 실력 모자라서 짜증나!!! 일변도로 달릴 뿐이죠. 그러다 결국 매 주 벌어지는 탈락자 선정에 매우 근접할 정도로 랭킹이 떨어지게 되는데...
그때 엄마에게서 연락을 받습니다. 니 아버지 찾았다. 산에서 등산객들이 발견했는데 죽은지 오래 돼서 신원 파악도 힘들었다는구나...
이제 아빠를 다시 만나 화를 낼 기회도 없어진 김재우씨는 더욱 더 열 받아서 그 갈 길 없는 분노를 아무 데나 들이 붓다가 황태수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그래도 매너 좋게만 행동하는 황태수에게 너무나 화가 나서 폭주. 일방적으로 황태수를 두들겨 패 버립니다. 근데 이게 싸워서 이긴 게 아니라 황태수가 아무리 맞아도 가드 조차 올리지 않고 순순히 맞고 있었기 때문이었구요. 모두가 현장을 목격했음에도 '내가 혼자 넘어진 걸로 해달라'며 김재우를 배려해주는 황태수... 지만 그저 더더욱 화가 날 뿐이고. 그러다 대련 중에 그만 유일하게 자길 챙겨주던 사람 좋은 아저씨에게 부상을 입혀요. 이 사람은 나이 때문에 이번에 국가 대표로 선발될 마지막 기회였는데 그걸 김재우씨가 날려 버린 거죠. 망연자실. 하지만 그 아저씨는 끝까지 웃으며 '우린 검도인이잖아. 그치?' 라며 재우를 위로하고. '네 아버지가 어떤 생각을 했는진 모르겠지만, 그것도 아마 검도인이라서 그런 걸 거야...' 라는 말을 남기고 퇴소합니다. 얘기를 듣자하니 황태수는 재우의 형을 죽인 후 비정상적일 정도로 너무나도 강렬하게 자책만 해서 소년원이 아니라 병원에 가야 할 지경이었다고 해요. 그리고 재우의 아버지는 아들의 원수를 용서하고 이 사건의 어떤 의미를 찾는 차원에서 황태수에게 검도를 가르쳤던 거죠. 그렇다고 처자식 버리고 사라져 버리면 어쩌냐 이 인간아.
결국 재우는 원래는 째려고 했던 아빠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거길 다녀온 후 마음을 다잡고 다시 훈련에 매진합니다. 자기가 진상 부렸던 분석 요원에게도 스스로 찾아가 사과하고 조언을 구하구요. 결정적으로 재우에게 도움이 된 건 황태수가 밤마다 혼자 훈련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왼손으로만 검을 휘두르는 훈련을 하는 모습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다가...
마지막은 당연히 둘의 대련입니다. 이제 마음 속 번뇌와 분노를 거의 풀어내고 차분하게 승부에 임하는 재우. 하지만 역시 황태수는 강적이신 것인데요. 긴장되는 순간이 이어지다가 재우가 중반에 황태수에게 당했던 패턴을 반복합니다. 정면으로 내려치는 공격을 강하게 시전했는데 황태수가 뒤로 여유롭게 빠진 후에 빠르게 다시 치고 들어오며 머리를 가격했던 패턴인데... 역시나 혼신의 내려치기는 실패하고. 가드가 빈 재우의 머리를 노리고 태수가 다가오는 순간 재우는 검을 왼손 하나로 잡고 웅크렸던 자세로 추진력을 얻어(...) 앞으로 뛰쳐나가며 한 손 찌르기를 시전합니다. 화면은 하얗게 페이드 아웃 되구요.
장면이 바뀌면 대련 1위의 증표인 하얀 검도복을 입은 재우의 평온한 표정이 보입니다. 국가 대표가 됐는지 황태수를 이겼는지 어쨌는진 모르겠지만 암튼 그런 건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김재우씨는 오랜 한과 분노를 떨치고 마음의 평온을 얻었고 이제 좀 더 건강하고 밝은 삶을 사는 검도인이 될 겁니다. 이걸로 엔딩이에요.
2024.02.23 09:41
2024.02.24 14:51
2024.02.23 17:38
2024.02.24 14:54
2024.02.23 21:17
딱 일본 스포츠 소년만화스러운 설정인데 웃음기 하나없이 진지하고 감정적 깊이가 있는 화법으로 풀어내는 게 좋았어요. 그렇다고 지루하지도 않고 긴장감이 상당하죠. 검도 대련 장면은 박진감도 대단했고 극장에서 보지 못한 게 아쉬웠죠.
캐릭터들도 전형적인 설정이면서도 쉽게 기능적으로 낭비되는 게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 느낌이 나고 주인공이 쓰러트려야할 황태수도 미워할수는 없게 매력적으로 잘 그려진 캐릭터였어요. 그런데 지적하신 것처럼 주인공 아빠는 좀 진짜... 뭐 어떤 심정인지 아예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정말 저렇게까지 할 수 있어?라는 생각이 자꾸 들죠. 주인공의 심적 고통과 앞으로의 고난을 더해주기 위해 무리수를 둔 것 같아요.
2024.02.24 14:56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로 주연배우를 처음 봤기 때문에, 여기서 훨씬 더 진지한 모습이 다르게 느껴졌지요.
정말 익숙한 유형의 이야기를 우직하면서도 강렬하게 그려나가니 상영 시간 내내 시선이 화면에 고정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참고로 올해의 한국 영화 목록에 본 영화를 포함시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