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로 (2006)

2010.02.13 00:40

DJUNA 조회 수:10586


현우는 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약혼녀 민주를 잃었습니다. 10년 뒤, 인간성 뻑뻑한 검사가 되어 있는 현우에게 민주의 아버지가 찾아와 딸이 남긴 다이어리를 건네줍니다. 현우는 그 안에 적혀 있는 신혼여행 계획서를 따라 여행을 떠나는데, 그러는 동안 세진이라는 여자와 자꾸 길이 엇갈리게 되지요. 놀랍게도 세진은 민주의 유령에게 빙의라도 된 듯 민주처럼 행동하고 심지어 다이어리에 적힌 민주의 문장들을 그대로 따라하기까지 합니다.


설정 죽이지 않습니까?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회한과 그 상처의 치유과정이 적당한 초현실주의에 섞여 흐르니, [가을로]의 이야기는 가슴 떨리는 근사한 유령영화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물론 '유령영화'라고 해서 꼭 진짜 유령이 나와야 한다는 법은 없지요. 유령의 기능을 충실하게 해내는 대체 설정이 충분히 단단하면 됩니다.

그러나 영화 각본을 쓰는 데 '죽이는 설정'만큼이나 무시무시한 장애는 없습니다. 대부분 이런 각본은 쉽게 안이해지고 '죽이는 설정'이 전면에 등장하는 바로 그 순간 할 말이 없어져 버리거든요. 각본가라면 가장 경계해야 마땅한 소재인 것입니다. 그리고 슬프게도 [가을로]의 각본은 거의 교과서적으로 이 함정에 빠져 버립니다.


[가을로]의 구성은 굉장히 위태롭습니다. 얼핏 보면 문제될 게 없어 보이죠. 복선은 풍부하고 모든 사건들은 나름 이치에 맞게 설명되니까요. 하지만 정서적인 흐름을 고려한다면 문제는 상당히 큽니다. 가장 큰 문제는 미스터리가 너무 얇다는 것이죠. 영화를 보기도 전에도 진상을 알 수 있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너무나 명백한 단서들이 굴러다녀 모를 수가 없는 해답이 클라이막스에서야 간신히 공개되니 그 동안 관객들은 갑갑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더 큰 문제는 미스터리가 풀린 뒤 현우와 세진이 할 일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미스터리의 공개와 함께 둘의 드라마도 끝나 버려요. 삼각관계 로맨스 영화인데도 로맨스의 절반이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설정 빼면 이야기가 없어요!


더 나쁜 건 영화가 존재하는 거의 모든 장르 멜로드라마의 도식에 발목이 잡혀 버렸다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물고 늘어지고 싶은 건 꼭 연속극 팬들이 '명대사'라며 게시판에 올릴 법한 감상적이고 인공적인 대사들입니다. 현우의 프로포즈와 같은 설정들은 너무나도 닭살이고 설득력이 떨어져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갑갑해질 지경이고요. 각본가도 그걸 알았는지 중간중간에 유머를 넣어 그걸 극복하려 하지만 그 삽입 자체도 그렇게 자연스럽지가 못합니다. 종종 배우들이 불쌍해질 정도죠. 현우의 심적 고민과 여행의 핑계를 만들어주기 위해 삽입된 부패 정치가 관련 사건도 계산 착오입니다. 지나치게 무거워요. 삼풍 백화점 사건은 분명 끔찍한 사고입니다. 하지만 10년 뒤의 현실세계에서는 검사 나으리의 과거사보다 지금 당장이라도 집과 재산을 날려버릴지도 모를 세입자들의 문제가 더 중요하죠.


영화적 가능성은 드라마의 가능성보다 조금 더 살아 있습니다. [가을로]의 설정에서 가장 흥미로운 건 10년이라는 세월의 벽을 무시하고 과거와 현재를,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을 하나의 영화적 흐름 안에 묶어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다는 것이죠. 이 각본에는 이것과 관련된 수많은 아이디어들이 있고 그 아이디어들은 썩 그럴싸하게 영화에 삽입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딱딱하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영화는 그냥 각본의 아이디어를 마디마디마다 반영하고 있을 뿐, 총체적인 흐름은 형성하지 못합니다.


총체적인 흐름을 깨는 결정적인 요소는 음악입니다. 이 영화에는 모짜르트, 헨델, 볼프-페라리의 기성곡과 창작곡들이 반반씩 섞여 있는데, 모두 끔찍한 수준입니다. 삽입된 클래식 음악들은 모두 훌륭한 고전이지만 선곡이 어이가 없을 정도로 안이하고, 창작곡들은 KBS 일일연속극에서도 민망해서 안 쓸 정도로 신파입니다. 전 분위기 파악 못하고 감정을 강요하는 한국 영화음악에 대해 어느 정도 체념한 상태지만 이건 좀 심했어요. 어쩌다가 이런 음악이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경력을 보면 그럴 사람들이 아닌데. 뭔가 뒷이야기가 있을 게 확실합니다. 그런다고 변명이 되는 건 아니지만.


좋은 점은? 이모개의 카메라가 담은 가을 풍경은 무척 아름다워요. [가을로]는 훌륭한 관광 영화입니다. 배우들은 적절하게 캐스팅되었고, 종종 뻣뻣한 각본에 걸려 넘어가긴 해도 자기 역할을 합니다. 여기서 가장 덕을 본 배우는 엄지원이었던 것 같군요. 자기네 기존 이미지를 재활용하는 김지수와 유지태와는 달리 새롭게 뭔가 할 거리가 있는 캐릭터였거든요. 드라마가 조금 더 풍성했다면 성과도 더 컸겠지만... 지금도 괜찮아요.


유감스럽게도 이 영화의 가장 좋은 부분은 영화가 마땅히 완성했어야 할 로맨스의 가능성입니다. [가을로]는 보기 좋은 모델 하우스와 같습니다. 모델하우스가 집처럼 생겼지만 진짜 집이 아니듯 이 영화도 로맨스 영화 같지만 로맨스가 아니에요. (06/10/17)


★★☆


기타등등

보는 동안 [엘리자베스타운]의 후반부가 자꾸 떠오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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