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가마귀 키우기 Cría Cuervos (1976)

2010.02.06 18:19

DJUNA 조회 수:12207


1.

제목이 꽤 많은 영화입니다. 원제인 'Cría Cuervos'는 말 그대로 '갈가마귀 키우기' 쯤 되니 'Raise Ravens'이란 영어 제목은 거의 직역이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영어권에서는 'The Secret of Anna'라는 제목으로도 상영된 적이 있답니다. 그것 뿐만이 아니에요. 'Cria!'로 제목을 바꾸어 단 스페인어 버전도 본 적 있어요. 제가 가지고 있는 영어 자막판은 'Cria!'를 비디오 커버 제목으로 달고 있지만 본 영화에서는 'Cría Cuervos'를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Cría Cuervos가 무슨 뜻이냐고요? 저도 한동안 이 때문에 골치를 썩혔답니다. 하지만 스페인어에 능한 친구 하나가 제목의 뜻을 알려주더군요. 옛 스페인 속담에서 따온 것이랍니다. "갈가마귀를 키워놓으면 주인 눈을 뽑아간다"라나.


2.

이레네, 아나, 마이테는 졸지에 고아가 된 세 자매입니다. 엄마인 마리아는 지병으로 죽었고 아빠 안셀모는 친구 아내와 섹스하다 그만 복상사해버렸죠. 죽은 엄마 아빠의 빈 자리는 이모가 차지하고, 세 자매는 이모랑 거의 식물인간이 된 외할머니와 함께 고아가 된 해의 첫 방학을 보냅니다. 영화는 아빠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해서 개학이 되어 쫄랑쫄랑 학교로 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에서 끝납니다.


간단한 내용 같지만 정작 영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일단 시간을 비비 꼬는 베리만식 수법 때문에 영화의 모양새는 훨씬 입체적이지요. 아빠가 죽은 해인 현재를 중심으로, 영화는 부모가 살아있었을 때인 과거와, 어른이 되어 '현재'를 회상하는 '미래'의 아나를 한 화면에 밀어넣고 뒤섞습니다.


그 때문에 처음 영화를 볼 때는 상당히 헛갈릴 수도 있습니다. 아나가 보는 마리아의 환영(?)은 종종 회상 속의 마리아로 넘어가고 또 제랄딘 채플린이 마리아와 어른이 된 미래의 아나 역을 동시에 연기하고 있으니 종종 관객들은 자기가 누굴 보고 있는 건지 몰라 어리둥절할 겁니다.


시간도 이상하지요. 어른이 된 아나는 35살이니 화면 속에 나오는 이야기는 거의 20년전 사건입니다. 하지만 그 시대는 70년대예요. 그럼 어른이 된 아나는 90년대 쯤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요?


3.

하지만 이 방식은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영화는 프랑코 정권 말기를 사는 이 중상층 가족이 때깔좋은 껍질 속에 숨겨놓았던 어두운 면을 하나씩 벗겨나갑니다. 계단 너머로 엿보는 아이들의 눈과 소꿉놀이, 숨바꼭질 같은 당연한 게임들도 여기서는 은밀한 폭로자가 됩니다.


그리고 어른 아나가 처음으로 등장해서 관객들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을 때, 영화는 첫번째 극적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아나는 자기가 아버지를 살해했다고 믿고 있었던 거죠! 어머니가 비참한 말년을 맞은 것이 아버지 탓이라고 생각한 이 꼬마는 그만 자기가 독약이라고 생각하는 가루를 아버지의 음료수에 넣었던 겁니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히치콕적인 의미에서 가톨릭 풍이 됩니다. 아나는 자기가 저지르지도 않은 살인으로 아버지의 심판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윗세대의 죄와 고통까지 덤으로 물려받았던 거죠. 이런 죄의 전이는 사우라 자신의 죄의식 또는 분노를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영화는 남몰래 역사적인 무게를 부여받고 있습니다. 아나의 가족의 이야기는 프랑코 정권 말기의 스페인과 은밀하게 겹쳐져 있습니다. 안셀모를 장교로 설정한 것, 그에게 복상사라는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부여한 것 역시 단순한 우연은 아니고요.


영화의 각본이 프랑코의 죽음 이전에 쓰여졌다고 하더라도 그 미래는 누구나 예측 가능한 것이었으니 그 해석이 영향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또 그랬기 때문에 이 영화의 등장과 비평적 성과가 프랑코 이후의 스페인 영화계에서 그렇게 상징적인 의미를 띄었던 거고요.


하지만 영화는 세월이 흐를수록 보다 보편적인 작품으로 변해가는 것 같습니다. 하긴 이 영화의 역사적 배경에만 매달려 영화의 모든 부분을 프랑코에 끼워 맞추는 것도 상당히 지겨운 일이 될 겁니다. 이 영화가 그렇게 직유로만 가득 찬 영화도 아니고요.


4.

제랄딘 채플린은 아버지의 너무나도 거대한 그늘과 '국제적 배우'라는 고약한 위치 때문에 종종 과소평가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채플린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좋은 배우이며, 우리가 잊고 있어서 그렇지 흥미진진한 영화도 상당히 많습니다. 특히 카를로스 사우라와의 긴 협력관계 중 나온 수많은 영화들은 모두 주목할 만해요. 이 영화에서도 채플린의 연기는 시적이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아나 역의 아나 토렌트입니다. [벌집의 정령]으로부터 3년이 지났지만 (그래봤자 기껏해야 8살입니다) 세상 죄를 다 짊어진 듯한 토렌트의 서글픈 까만 눈은 여전합니다. [벌집의 정령]의 토렌트가 보여주었던 거의 괴기스러울 정도였던 시적 분위기와 이 영화의 토렌트가 보여주는 정밀한 쉬르레알리즘을 비교하는 것도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98/12/13)


★★★★


기타등등

카를로스 사우라-제랄딘 채플린-아나 토렌트의 콤비는 사우라의 다음 작품인 [내 사랑 엘리사(제목만 보고 속지 마시길. 연애영화가 아닙니다)]에서도 이어집니다. 이 영화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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