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길어올리기 (2011)

2011.03.10 14:10

DJUNA 조회 수:9579


[달빛 길어올리기]의 소재는, 전주시가 문화체육관광부와 함께 추진 중인 [조선왕조실록] 복본화 사업입니다. 영화 보기 전에 검색해봤는데, 이는 임진왜란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실록인 전주사고본과 똑같은 복사본을 전주한지로 만드는 작업이라고 합니다. 이 소재를 다루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큐멘터리를 찍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공해야 할 정보가 가장 중요하니까요.  


하지만 [달빛 길어올리기]는 극영화를 택했습니다. 뇌경색으로 몸이 불편한 아내 효경의 수발을 들며 살아가는 7급 공무원 필용이 시청 한지과에서 [조선왕조실록] 복본화 작업에 참여한다는 이야기죠. 그러는 동안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는데, 그중 일부는 이런 사업에 관련된 공무원들이 겪을 수 있는 일상적인 일들이고, 일부는 사람들이 극영화를 만들면 꼭 넣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관습적인 로맨스이며, 일부는 전통과 전통의 가치를 묘사하기 위해 삽입한 상징적 드라마입니다.  


이런 시도가 도전적으로 보인다면, 전 부럽다고 할 것입니다. 그건 여러분이 문화영화의 고문을 견뎌낸 경험이 없다는 뜻이니까요. [달빛 길어올리기]는 척 봐도 장편 문화영화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그건 자발성입니다. 국가가 시켜서 억지로 만든 영화가 아니라, 영화감독이 스스로 택한 영화라는 거죠. 이 차이는 예상 외로 큽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장르의 어색함이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이 영화에서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는 서로에 종속되어 있는데, 대부분의 경우 서로를 살려주는 대신 눌러버립니다. 특히 극영화가 손해를 보죠. 원래 문화영화가 그런 장르였어요. 극영화의 당의를 입고 정보와 교훈을 전달하려는 시도는 자연스럽기가 쉽지 않죠. 장치 자체가 인공적인 걸요. 


예를 몇 개 들어 볼까요? 이 영화에는 정보전달이 1차 목적이면서 일상어를 위장한 대사들이 넘쳐나요. 자기 말을 듣는 상대방이 주제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갖고 있는 게 뻔한 데도 오로지 관객들을 위해 복잡한 정보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대사를 읊어야 하는 상황인 겁니다. 민망하죠. 속이 너무 훤히 들여다보이니까. 드라마의 자연스러움이 깨지는 건 물론이고. 물론 배우들도 고생을 엄청 합니다. 특히 걸어다니는 해설사인 박중훈은. 그는 정확한 발성이 장점인 배우가 아니지 않습니까. 영화 내내 엄청나게 많이 걸려 넘어집니다. 


캐릭터나 드라마 역시 손해를 봅니다. 기능성이 너무 잘 보이니까요. 특히 중간에 필용과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는 다큐멘터리 감독 지원에게는 오로지 두 개의 목적밖에 없는 거 같습니다. 정보 전달용 다큐멘터리를 찍고, 남는 시간에는 당의 역할의 로맨스를 제공하는. 그 목적이 너무 노골적이라 몰입하기가 쉽지 않아요. 어색하게 삽입된 효경의 고향 찾기 이야기는 그냥 시대와 안 맞습니다. 이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우리가 정보화시대에 살고 있다는 걸 까먹고 있나 봐요. 기껏해야 30대 중후반인 젊은 여성의 고향을 찾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요.  


그러는 동안 다큐멘터리도 손해를 봅니다. [조선왕조실록] 복본화 작업은 깨알 같은 정보 전달이 필수인 소재입니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관객들은 이 사업에 대한 온전한 정보를 제대로 얻을 수 없습니다. 극영화의 형식이 그 정보들을 계속 끊어먹고 있기 때문이죠. 심지어 중간중간에 다큐멘터리 클립들을 통째로 삽입해도 그렇습니다. 실존인물과 비전문 연기자 카메오, 전문배우들이 섞여 있는 캐스팅도 혼란스럽습니다. 한국영화계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아마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위원장이나 감독의 부인인 채령이 연기하는 캐릭터들을 실존인물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나쁜 것은 이 영화가 한지 전통을 예찬하기 위해 정보를 일부러 편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 복본화 사업은 전통과 첨단과학기술의 정교한 만남입니다. 이 산업에 들어가는 한지는 모두 인쇄용지로 일부 가공된 것이며 텍스트는 디지털로 프린트됩니다. 하지만 관객들이 영화에서 이 정보를 온전하게 얻을 수 있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여기저기에 작은 정보들이 숨어있긴 합니다만, 그것들도 외딴 산골에서 달빛의 정기를 받아 한장씩 종이를 만드는 전통 장인의 고아한 이미지에 묻혀 버립니다. 음, 미안하지만 저에겐 이건 오리엔탈리즘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의 경계선에서 종종 매력적인 순간들이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많은 인터뷰들은 다큐멘터리의 정보를 담고 있지만 극영화로 연출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다큐멘터리라면 놓쳐버리거나, 넣더라도 인공적이 될 법한 캐릭터 묘사가 극영화의 틀 안에서 살아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전 [달빛 길어올리기]가 전주시 홍보물로 만들어졌다는 걸 조금도 나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루는 소재는 여전히 매력적이고, 만드는 사람들도 이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영화가 주는 정보는 빈약하거나 왜곡되어 있고, 드라마는 인공적입니다. 오로지 [조선왕조실록] 복본화 산업과 한지 제작 과정에 대한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맛뵈기용으로 만들어진 거라면, 영화는 성공작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게 의도는 아니었을 겁니다. (11/03/10)


★★☆


기타등등

가장 좋은 건 제목입니다. 근데 오프닝 크레딧의 제목이 좌종서(左縱書)인 건 신경쓰이더군요.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음, 그래도 되는 건가요? 요새는 심지어 사극에도 이런 게 자주 보이는 것 같아서.


감독: 임권택, 출연: 박중훈, 강수연, 예지원, 안병경, 장항선, 한수연, 권현상, 김동호, 다른 제목: Hanji


IMDb http://www.imdb.com/title/tt1703845/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7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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