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날, 느즈막히 일어나서 서점 산책을 가면서 책 타겟을 '독서일기, 독서편력, 독서기술' 언저리로 잡고 듀게에 질문을 올렸더랩니다. 딱 제가 원하는 책들을 줄줄 추천해주셔서, 리스트들을 모조리 장바구니에 담아 놓고 잠시 뿌듯해 한 후, 그 중 가볍고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녀석과 박완서님 에세이 한 권을 바로드림 때리고 교보로 날랐습니다.  

 

아 참, 듀라셀님이 추천해 주신 다치바나의 <지식의 단련법>은 집에 있더군요. 심지어 제 침대 발치 책장에 떡 하니. 사 놓고 안 읽은 녀석들이 많으니 사놓고도 모르는 불상사가.. (어떤 소설은 샀는지 안 샀는지 까먹어서 3권 산 적도 있다는-_- 그게 댄 브라운꺼라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을 못하겠 ㅠㅠ)  리플 읽으며 내가 왜 '고양이 빌딩'을 알고 있지? 했는데,  알고 보니 심지어 저 책을 좀 읽었기 때문이더군요...(이 책에 나온 내용 맞던가요? 이 분의 다른 책인가? 고양이 빌딩 비서..를 뽑느라 소동을 벌이는 내용이 어딘가에 나왔던 것 같아요.)  덕분에 '있는 녀석 부터 읽어 치우자'는 내부 룰에 따라, 다음 독서 관련 책은 <지식의 단련법>으로 결정했습니다.

 

 

하여간 어제 바로드림을 한 녀석은 닉 혼비의 <런던 스타일 책 읽기>입니다. 이 분 작품은 영화로 참 재미있게 봤고, 소설로는 자살하려 모인 4명의 남녀가 으쌰으쌰하는 내용의 책을 반 정도까지 읽었던 것 같아요. 읽으면서 낄낄대며 좋아했음에도 불구하고 진도는 중간에 멈추더군요. (하긴 드라마나 소설이나 보통의 '이야기'는 저는 어지간하면 다 못 보는 듯..그러고보면 아무리 마음에 드는 드라마라도, 끝까지 제대로 본 적이 거의 없었거든요.) 하지만 '참 재미있게 글을 잘 쓰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이 분의 독서기도 재미있을거라 생각하고 낼름 샀습니다.

 

그리고, 저 책은 제 기대에 훌륭히 부응했습니다. 진짜 웃겨요 ㅋㅋㅋ 카페에 홀로 앉아 읽는데, 제가 하도 낄낄대니까, 제 옆에 앉아 왠종일 서울대 들어가 변리사에 합격하고 끼리끼리만 뭉쳐 노는 자기 조카 이야기에 자기 친구 아들 누구누가 어느 의대를 갔는데 거기 의사고시 합격률이 별로라 걱정이라는 둥 '너무 잘 키워놓으니 지 잘나서 결혼 안가려 해서 참 힘들'며 구체적으로 이어지는 자식 욕(왜 이렇게 잘났나..)을 지치지 않는 정열과 에너지로 3시간 넘게  이어가시던 우아한 중년 부인 친구 커플이 종종 눈치를 주시더군요. 음, 저는 저런 류의 이야기에는 소름과 짜증과 히스테리가 동시에 터지는터라 어지간하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물론 상대방은 못 알아차리게 얌전히;;-_-;;) 다른 곳으로 피하는 편인데, 어제는 다른 앉을 자리도 없고 한창 책도 잘 읽고 있었던터라 이동하기도 싫더군요. 그래서 지금도 계속 듣고 있는 <The Power of Now>에서 배운 방법, 즉 그분들의 말의 내용이나 제 가슴속에 뭉클거리는 거부감과 짜증 등에 더 이상 추가적인 반응을 하지 않은 채 그저 가만히 조용히 비판단적으로 관찰하면서, 그저 저 자신속으로, 그 때 그 순간 속으로, 제 손에 들고 있는 읽을 거리 속으로 다시 침잠했죠. 그래서 결국 중년부인들의 수다를 BGM으로 깔고서도닉 혼비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한 채 책과 사투를 벌이다 결국 장엄하게 패배하고 책을 저 멀리 집어던지는 장면들을 다시 읽어 나가며 다시금 낄낄거릴 수 있었어요. 저 잘했죠? +_+

 

<런던 스타일 책 읽기>는 <빌리버>라는, 닉 혼비에 따르면 (다른 곳에서 다들 신나게 열심히 해대는) 비평적인 서평은 절대 하지 않고 (그 잡지가 작가, 독자들에게 안식의 오아시스가 될 수 있도록..) 긍정적인 평만 하기로 노선을 정한 잡지에 기고한 독서에세이 입니다. 하필 그런 노선의 잡지에 성격 드러운 작가가 기고를 했으니 충돌은 뻔한 일이죠. 책 내내 '저번에 무슨 무슨 책이 구리다고 썼다가 칼럼 3달 정지를 먹었다'는 둥의 투덜거림과 빌리버 편집진과의 전투기가  이어집니다. 결국 작가는 '읽어서 나쁜 소리 나올 일 없는 확실한 작품만 골라 읽고, 혹시 그렇게나 조심했음에도 똥을 밟았으면 절대로 제목과 작가를 언급하지 말자'고 다짐하지요. 칼럼은 매 달 한 번씩 이어지고, 칼럼 초입에 '이번달에 산 책'과 '이번달에 읽은 책'이 등장하는데, 이번달에 산 책의 리스트가 훨씬 긴 것은 물론이요, 작가가  '사실 산 책이 이것 보다 훨씬 더 많은데 독자들의 혐오감 방지를 위해 간추려 썼다'고 밝힌 바 대로, 어마어마하게 질러대는 것에 비해 읽어 치우는 양은 미비한 자신의 독서편력을 솔직하게 털어놓습니다.

 

닉 혼비는,   '제발 베고 자도 될 그 두툼한 책을 바위를 갉아내는 속도로 읽어내면서 멋진 독서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하지 말라!! 스스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인정하면서 어째서 '하지만 그래도 참 좋았다. 정말 좋은 책이야..'라고 말할 수 있나!!'며 (스스로에게) 재미 없는 책을 읽는 것의 한심함을 질타합니다. 결국 '독서가 취미로 확고히 자리 잡기 위해서는 재미가 일순위가 되어야된다!는 논리죠. 책의 수준에 신경쓰고 자신의 감각은 무시한 채 평론가들의 평에 신경 쓰며 공부하듯 노동하듯 독서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며,  평론가들의 눈 보다는 대중의 눈을 더 신뢰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실 그의 친구들은 작가이고 평론가들이며, 자신이 골라 읽는 책들도 평론가들의 평을 주로 참고하는 경우가 많고, 결국 혼비는 문학을 지극히 사랑하기에 그가 읽는 '대중이 좋아하는 소설'은 우리가 기대하는 그런 것들은 아닙니다. 더불어 그는 추리와 스릴러와 심지어 만화에는 관대하지만 SF나 환타지에는 아주 편협(이 부분 정말 웃겨요 ㅋㅋㅋ)하게 반응하고, 좋은 플롯이나 제대로 된 농담이 결여된 문예소설, 특히 '언어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소설', '소설 그 자체에 대해 쓰는 소설'에 현저히 참을성을 결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독서기 자체 보다 독서기 와중에 드러나는 작가의 성격과 생활상, 빌리버 잡지 편집부와의 전투, 그리고 이래 저래 오락가락 하며 말도 잘 바꾸는 작가의 난리통과 거칠고 위트있는 입담 자체가 훨씬 재미있기도 합니다. 그의 독서론에 동의하지 않거나, 독서기에 그냥 그런 느낌을 가졌다 해도  이 부분들은 충분히 재미있을거에요.

 

 

 

이 책이 저의 독서 생활에 준 영향은 다음과 같습니다.

 

 

읽고 싶은걸, 읽고 싶은 방식으로 읽어라. 어짜기 저자도 쓰고 싶은걸, 쓰고 싶은 방식대로 쓸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독서를 너무 무거운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 책은 즐거운 것. 그 어떤 매체와 비교해도 우월하게 승리 할 만한 것, (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혼비이지만, 아스날 경기가 있는 달이면 책이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고, 좋아하는 밴드 콘서트나 멋진 공연에 폭 빠진 달이면 '책 한권이  기껏 해 봒자 나를 방방 뛰게 만들 수 있겠냐!!'며 다른 매체 편을 서슴없이 들지요. 말 참 잘 바꿔요 ㅋㅋ 스스로도 대 놓고 저번달에 내가 한 이야기는 다 쓰레기라고 무시하라고 권고하지 않나..) 그런 책에서 얻는 즐거움을 최대한 즐기라. 어떤 책을 읽더라도 그게 당신에게 즐겁다면 가장 훌륭하다. 책의 수준을 고민하지 말라. 그냥 재미있는 것을 읽어. 그것이 독서가 인생에서 가장 큰 휴식과 즐거움이 되는 길이니.. 즐겁지 않으면 할 필요가 없잖아. 그리고 독서기도 그냥 쓰고 싶은대로 써. 책은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책을 읽는 당시의 감정상황이나 책을 선택하고 읽게 된 맥락도 그만큼 중요하다. 책 자체만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는가? 그 책을 읽게 된 언저리의 주변 상황도 나의 감정상태도 내 일상도 그 책을 읽고 해석하는 나의 일부인 것을.. 그러니까 맘대로 쓰라(고 주장하는건 아닌데, 본인이 맘대로 쓰고 있더라고요-_-) 그래야 즐겁게 오래하지.

 

 

재미있는 분이에요. 재미있는 책이고요. 그리고 이런(?) 책이지만, 이것 저것 읽어보고 싶어지는 추천 서적도 많답니다(한국에 안 나온 녀석이 많아서 문제지만;). 결국 혼비는 문학과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니까요. 아, 딕킨스 책은 좀 읽어봐야겠어요. (딕킨스 찬양질로 수십 페이지를 채운 딕킨스 빠돌 아저씨-ㅅ-)...  하여간 다음 다음 즈음 소설은 닉 혼비의, 읽다 만 소설을 웨이팅리스트에..

 

<런던 스타일 책 읽기> , 넘치는 유머와 빠른 속도감과 적당한 정도의 가벼움, 솔직하고 빠르고 다양하게 삽입되는 이야깃거리들과 책 이야기들이 유쾌발랄하고 재미있어 책장이 술술 넘어갑니다. 그리고 좋은 작가이자 책을 사랑하는 사람 답게 촌철살인의 대목도 많아요 ^^ 그리고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지만,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재미있어요. 작가가 막 나가니까 나도 안심하고 '그건 아니지 닉~'하며 시크하게 대꾸 할 수 있거든요. 추천해주셨던 빠삐용님 감사.

 

 

p.s. 닉 혼비는 아스날과 디킨스와 이코노미스트와 뉴요커의 팬이에요. 앞의 두 녀석은 됐고, 이코노미스트는 저도 충분히 끄덕끄덕 하는데, 뉴요커는 어떤 성격의 간행물인가요? 교양지?라는건 아는데. NYT에서 기사 잘못 눌렀던가 하여간 그래서 몇 번 들어가 본 적이 있는데 기사 길이가 너무 후덜덜 해서 비루한 제 독해력으로는 즐겁게 가볍게 읽어 치우기는 많이 무리더라고요-_-  하아..제 영어 독해능력이 한국어의 1/3? 1/2만 되었어도 킨들을 지르는건데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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