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의 계곡과 페미니즘

2021.04.16 13:28

MELM 조회 수:983

한때 맑시스트였던 정치학자 아담 쉐보르스키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전환이 어려운지에 대해 '전환의 계곡'이라는 이론을 제시했습니다. 이 이론의 몇 가지 전제는 1) 사회주의로의 전환은 노동계급에게 이익이 된다. 2)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에 기초해서 투표한다. 정도가 있습니다. 이 두 전제에 따르면,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사실 이 명제는 독일에서 사민당의 약진에 감탄한 엥겔스 이후 많은 사민주의자들로부터 동의를 얻었습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민주주의가 발달한 국가 중 사회주의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국가가 없었습니다. 그 결과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노동자들의 합리적 선택을 가로막는 허위의식을 다루는 이데올로기론이 발전했죠. 


반면 아담 쉐보르스키는 이 문제를 노동자의 허위의식이 아닌 '전환의 계곡'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노동계급의 이익은 사회주의로 전환됨에 따라 우상향 합니다. 다만 문제는 이 우상향 그래프가 선형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회주의로 전환이 이루어지는 시기에는 필연적으로 그래프 상에 U자형 계곡이 생겨납니다. 전환에는 비용이 들기 때문이죠. 사회주의로의 전환은 노동계급에게 장기적으로는 이득이 되겠지만, 단기적으로는 비용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애초에 자원이 없는 노동계급에게는 저런 단기적 비용 조차 큰 부담이 됩니다. 게다가 비용은 눈 앞의 일이고, 이익은 언제 올지 확신할 수 없는 미래의 일 입니다. 따라서 전환의 계곡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단기적 비용을 감당할 수 있게 자원을 확충해주어야 합니다. 또한 정치조직이 노동계급에게 밝은 미래에 대한 확신을 심어 주어서 비용을 감수하고라도 그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설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민주주의 국가는 몇 년 마다 선거를 치뤄야 하고, 그 결과 어떤 정당도 단기적 비용을 감수하라고 노동계급에게 요구하지 못합니다. 그건 코 앞의 선거를 포기하라는 말이니까요.


자유주의자들이 청년 남성들에게 페미니즘은 결국 당신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라는 말을 꺼낼 때, 그리고 그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현실을 볼 때, 위에서 언급한 전환의 계곡이 떠오릅니다. 장기적으로 양성평등은 남성에게도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러나 청년 남성들에게 그건 공자님 소리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코 앞에는 생존경쟁이 펼쳐져 있고, 여기서 실패하면 당장 삶이 날 모욕할 것이라고 믿는 청년들에게, 결국 도움이 될 것이라는 말은 너무나 머나먼 이야기입니다. 그 뜬구름 잡는 소리보다는 여성정책이 가져오는 당장의 비용에 민감해집니다. 이 비용의 보상이 언제 돌아올지, 돌아오기는 할지 알 수 없으니까요. 그나마 언젠가 청년 남성. 당신들에게도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해주면 다행입니다. 다수는 그렇게 친절하지 않고, 설득하려고 나서지도 않으니까요.


결국 이 문제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전환 비용을 감수할 수 있을 만큼의 자원을 제공하는 한편, 단기적 비용을 지출하면 장기적으로 보상이 있다는 점을 설득력있게 제시해줄 이데올로기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없다면 단기적 비용을 감당하라는 요구는 그들에게 존재에 대한 무시와 폭력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습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5398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954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2562
115456 여성에게 남성은 [36] Sonny 2021.04.17 1411
115455 [KBS1 독립영화관] 한강에게 [30] underground 2021.04.17 411
115454 왜 잠재적 범죄자 개념은 잘못되었으며 위험한가? [19] MELM 2021.04.16 1084
115453 철지난(?) “벚꽃 엔딩”의 추억 [4] 산호초2010 2021.04.16 375
115452 자신의 못생긴 외모에 대한 고백을 그린 만화 한편. [8] ND 2021.04.16 1010
115451 저 아주 예전부터 여러분께 꼭 묻고싶었어요 [3] 여름호빵 2021.04.16 806
» 전환의 계곡과 페미니즘 [16] MELM 2021.04.16 983
115449 아웃랜더 [4] 겨자 2021.04.16 1078
115448 새벽 잡담...(투기와 도박은 위험) [1] 여은성 2021.04.16 416
115447 #Remember0416 / 바다에 꽃 지다, 김정희 [7] 그날은달 2021.04.16 319
115446 아따 복잡하고 속시끄러븐 뭐 그딴 소리 나는 모르겠고 [4] ND 2021.04.15 611
115445 어쨌든 누구 탓을 하기에는 인생이 짧은거 같아요 [3] 고요 2021.04.15 664
115444 주말에 점을 봤어요. [8] 채찬 2021.04.15 517
115443 오랜만의 정경심 재판관련 소식(추가) [6] 왜냐하면 2021.04.15 889
115442 캐리비안의 해적: 블랙펄의 저주 (2003) [8] catgotmy 2021.04.15 318
115441 누군가 잃어버린 것 같은 고양이를 발견하면 어디에 글을 올려야 하는지? [8] 자갈밭 2021.04.15 578
115440 남자는 스스로 증명하라 [68] 모스리 2021.04.15 1586
115439 누가 멈춰를 이야기할 것인가? [1] 사팍 2021.04.15 439
115438 LG가 휴대폰 사업을 접는군요 22 [3] 메피스토 2021.04.14 562
115437 [EBS2 클래스e] 석영중의 <도스토예프스키와 여행을>, 김경민의 <도시를 알면 부동산이 보인다> [5] underground 2021.04.14 452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