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야그] 외국인 신부의 나라

2012.02.19 18:32

LH 조회 수:3001


요 근래 밥벌이용(그러나 마감이 밀린) 글을 쓰느라 정신없이 바빴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삘이 내려와서 끄적끄적. 

 

얼마전 50세가 넘은 한국인 남성과 베트남 여성과의 결혼을 금지하겠다는 이야기가 나오더군요. 뭐 법률이나 규제를 만들 정도는 아니고 그래야 하지 않겠느냐, 라는 이야기가 나온 정도인 듯 합니다만. 얼마나 상황이 나쁘면 그런 이야기가 나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씁쓸해집니다.

 

오래 전 버스를 타고 지나가던 도로 한 켠에 '착하고 안 도망가는'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란 플랜카드가 걸려있을 때 눈을 의심했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없어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떻게 그런 글귀를 보고 내버려둘 수 있나요. 하지만 그 플랜카드는 이후로도 오랫동안 그 자리에 걸려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말하겠지요. 그렇게라도 결혼을 해야 하는 절박한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런 광고도 해야 하는 거라고.

하지만 우리나라는 그럴 수 없어요.
우리나라의 옛날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럴 순 없어요.

 

1980년대 즈음의 일이어요. 일본의 농촌은 심각하게 결혼난을 겪고 있었습니다. 뭐, 뻔하죠. 단조롭고 힘든 농촌 생활이 싫으니 여성들은 도시로 가버리고 총각들만 남아 나이만 먹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내린 결정은... 신부를 외국에서 수입해오는 거였어요. 어디에서요? 바로 우리나라에서요.
가끔 대만이나 필리핀, 러시아

이 때 신붓감을 고르는 방식은 대강 이러했습니다. 먼저 브로커에게 돈을 낸 일본인 남성이 외국 여성 열 몇 명을 한꺼번에 보고 그 중에서 맘에 드는 여성을 신붓감으로 고르는 거여요. 그럼 여성은 단기비자를 받아 일본에 가서 결혼을 하는 거죠. 그렇게 결혼은 했다 해도 집안 경제권은 여전히 남성이 가지고 있었고, 결혼한 지 3년 뒤에야 귀화를 할 수 있었죠.
어디서 많이 들어본 거 같죠? 네, 그래요.
 
그렇게 일본으로 간 한국인 신부들은... 뭐, 잘 산 사람들도 있겠죠. 하지만 말도 안 통하고 적응도 힘들어 어렵게 살기도 했어요. 사기도 많았죠. 한국 여성과 결혼했는데 가출했다던가, 친정에 다녀온다고 한국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던가... 한국 여성도 피해입긴 마찬가지였죠. "자가용 있음, 아파트 있음, 공무원" 기타등등의 번드르르한 조건을 가진 일본인 신랑과 결혼하라는 신문 광고를 보고 갔는데 시골 깡촌에서 사는 장애인인 경우도 있었고, 결혼한 뒤 갖은 이유로 남편에게 폭행당하는 사람도 있었지요.
그들 사이에서 아이를 낳아도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니 교육 문제가 있었지요. 그런데다가 부인에게 경제권을 주질 않았거든요.  그러다가 도망나오고, 이혼하고, 외국인이니 호스티스일을 하며 벌어먹고 사는 등 고되게 살았지요.

 

그래도 이런 신붓감 수출은 그나마 나은 편이어요. 더욱 최악은 기생관광이었지요. 불과 20여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는 대놓고 기생관광의 나라로, 김포공항에는 깃발 하나 든 단체 일본 남자 관광객들과 그들을 마중나온 '기생들'로 붐볐지요. 일본 사람들이 대거 한국으로 섹스 관광을 온 것은 역시 싼 값에 모든 걸 해볼 수 있다는 거겠죠. "예쁘고 착하고 말 잘 듣는", 게다가 싼 - 섹스를 하러 오는 거였지요. 일본과 한국의 여성들이 공항에서 반대 시위를 벌였지만, 소용없었어요.

그렇게 한국이 섹스 관광의 메카가 되었는데도 정부는 이걸 규제하기는 커녕 오히려 편의까지 봐줬어요. 윤락여성들에게 아예 통금을 무시하고 다닐 수 있게 해주기까지 했죠. 접객여성 등록증을 발부하기도 했죠. 왜냐고요? 외화벌이가 되었거든요. 우리나라에는 어차피 근사한 관광거리도 없고, 만드는 물건도 변변치 않고, 외국인들이 와서 외국 술 마시고 벗은 여자들이랑 놀다 가는데 최소한 벗은 여자들이라도 우리나라 것으로 대체하자, 그럼 돈을 벌 수 있다... 그런 거였죠.

그럼 이렇게 관광에 종사하는 여성들이란 어떤 이들이었나.
뻔하죠. 가난한 집 아가씨들이었습니다. 인터뷰를 하면서도 우리가 가난해서 이러고 있지만 정신마저 일본에 물든 건 아니라고 힘주어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만, 그들에게 쏟아지는 세상의 눈초리는 당연히 싸늘했습니다. 소설 오발탄만 봐도 그렇죠. 그런 여성들이 가장 출세(?)한 것은 일본 사람의 현지처가 되는 경우였습니자만, 치정 사건에 얽혀 죽는 일도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참 말도 안 되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돈 벌어오라고 등 떠민 다음에, 그렇게 벌어오면 돈만 받아 챙기고 양공주라고 구박하는.
현진건의 소설 고향에서도 나오잖아요. 아버지가 14살 딸을 유곽에 팔아넘겼고, 딸은 10년동안 몸을 팔았지만 끝내 빚을 다 못 갚고 병들어 산송장이 되었는데, 가족은 어디갔는지 혼자 식모일 하잖아요. 그런 식의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던 게 우리나라였어요.

 

그리고 이제는, 그와 똑같은 일을 우리나라가 필리핀, 베트남, 캄보디아 등 다른 나라에 저지르고 있어요.

이건 뭔가 아니잖아요.
인권이고 여성 권리 문제고 아니고를 떠나서, 우리나라도 한 때 그랬던 처지에 이럴 수는 없는 거여요. 한 때 전쟁을 치렀고, 정말 정말 배고프고 가난했고 독일, 중동으로 일하러 갔던 외국인 노동자들의 나라였으며, 심지어 외국으로 시집가기까지 했던 여자들의 나라잖아요. 그 사람들이 그렇게 벌어온 외화로 이렇게 살게 된 거잖아요.
그런데 이제 좀 잘 살게 되었다고 이제까지 다른 나라에게 당했던 것과 똑같은 방법을 그대로 써서 다른 나라 사람들을 깔보고 무시한다는 게 좀 많이 부끄러워요. 주변의 아는 사람이 그래도 참 기분 더럽고 아는 척 하고 싶지 않아지는데, 하물며 내 나라가 그렇게 되는 걸 바라지 않아요.

 

앞서 플랜카드로 이야기로 돌아가보지요.
일본 농촌에 이런 게 걸려있다면 어떻겠어요? "착하고 도망가지 않는 한국 처녀와 결혼하세요..." 라고. 한국 사람으로 그걸 보았을 때 어쩔 수 없지, 하고 그냥 보아 넘길 수 있으려나요. 저는 못 할 거 같아요. 부끄럽고 창피하고 화가 날 거여요.

 

그렇다고 해서 이런 상황을 고쳐야 한다, 규제를 해야 한다, 뭐 그런 건 아니어요. 그건 불가능하고, 어떻게 대번에 고칠 수도 없을 거여요. 이건 참 많은 원인이 뒤얽힌, 뿌리깊은 문제니까요.
그냥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거여요. 그걸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그것조차도 모르는 사람들이 꽤, 굉장히 많더라고요.

이제까지 이야기한 것들을 알게 되면- 아마, 좀 다르게 느껴질 거여요.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편안함도 그렇고, 이제는 꽤 많이 마주치게 될 외국인 여성들도 그렇고,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 환경도 궁금해지고. 제가 바라는 건 그냥 예전을 기억해달라는 거여요. 그게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를 가늠할 수 있게 되니까요.


p.s : 이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뒤지던 중 우연히 발견한 신문기사입니다만. 1989년, 우리나라 농촌 총각들의 결혼 문제가 심각해질 지음, 농촌 총각들이 자체적으로 모임을 가집니다. 농촌총각 결혼대책위 준비위... 말 그대로 장가 못 간 농촌의 노총각들이 모여 "농민도 사람이다 장가 좀 가자"며 자체적으로 결혼하기 위한 모임을 발족했는데, 그런데 여기 대표 이름이 어디서 많이 뵌 분이네요. 사진 찍기를 쑥쓰러워하는 39세의 노총각 강기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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