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그대로 다큐멘터리입니다. 사건 하나를 다루는데 45분씩 13화나 되는 분량이에요. 스포일러 없이 뭔 얘길 하기 힘든 작품이긴 한데 그래도 스포일러 없이 적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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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년 12월의 일입니다. 여긴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의 '더럼'(옛날엔 '더램'이라고 불렀던 것 같은데)이라는 도시구요. 한밤중에 911 신고가 접수됩니다. 아내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죽어가고 있대요. 7분 후 구급 요원과 경찰이 도착하고, 30분 후 이 일은 살인 사건 수사로 전환되며 외부 침입자의 흔적이 없는 관계로 유일한 용의자는 집에 단 둘이 있었던 신고자, 남편이자 나름 유명한 작가인 마이클 피터슨입니다.


 사실 합당한 조치로 보입니다.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 사람 치고는 사방팔방에 피를 어마어마하게 많이 뿌리고 흘렸거든요. 머리에 난 상처도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계단에서 구른 상처로는 보이지 않구요. 하지만 피터슨이 동원한 변호인들의 논리에 따르면 그걸 낙상에 따른 결과로 보는 것도 아예 불가능하진 않아 보이고, 피터슨에겐 딱히 살인 동기가 없으며 (그래서 자식들도 아버지의 무죄를 믿습니다) 결정적으로 집을 아무리 뒤져도 흉기가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재판이 시작되면서...



 - 사건을 다루는 다큐멘터리지만 이 제작진의 방향성은 명확합니다. 피터슨의 편이에요. 그래서 십여년이 넘는 기간의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늘 피터슨과 피터슨 곁에 남은 가족들, 그리고 피터슨의 변호인들만 따라다니죠. 다큐 초반에는 피터슨이 범인이라 믿는 아내측 유족들의 모습도 종종 비춰줍니다만, 다큐의 내용이 피터슨 편이라서 제작진 저리 꺼지라고 그랬나봐요. 조금 나오고 말더라구요.


 그런데 한 가지 재밌는 건, 이 다큐가 노골적으로 '피터슨은 무죄다!' 라고 외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뭐 어쩔 수 없이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긴 하지만 (등장하는 인물들이 죄다 피터슨의 무죄를 믿는 사람들이니까요) 이 다큐가 말하려는 건 '피터슨은 무죄다!'가 아니라, '그가 무죄든 유죄든 간에 이런 일을 당해선 안 된다'는 겁니다. 피터슨 편향적인 부분들을 걷어내고 생각해봐도 피터슨이 받은 재판은 정말 개판이거든요.


 그러니까 결국 미국 사법 제도의 허점을 보여주고, 그것에 본격적으로 말려든 개인이 얼마나 억울하고 비참할 꼴을 당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다큐멘터리입니다. 그리고 그걸 되게 와닿도록 잘 보여줘요. 왜냐면 이 사건과 그 재판이 정말로 드라마틱하거든요. 실화가 아니라 순수한 허구의 드라마라고 해도 믿을 법한 전개를 거의 13화 내내 보여줘서 지루할 틈이 없이 쭉 달렸습니다.



 - 동시에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이 다큐는 꽤 훌륭한 가족 드라마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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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시다시피 가족 구성원이 좀 많죠. 이건 피터슨의 범상치 않은 인생 행적과 관련이 있는데... 뭐 하도 복잡해서 잘 기억도 안 납니다만. 암튼 15년의 세월 동안 이 구성원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다큐답게 현실적이면서도 동시에 꽤 감동적입니다. 심지어 인물들도 꽤 훌륭... (쿨럭;)



 - 마지막으로 이 쇼(?)의 하일라이트는 바로 마이클 피터슨이라는 사람 그 자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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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 쓴 사람은 담당 변호사입니다)


 피터슨이 결백하다고 믿는다면 이 할배는 정말 강인하면서도 매력적인 사람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고 늘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상냥하죠. 말빨도 좋아서 그럴싸하게 멋진 멘트들도 자주 남겨 주고요. 

 피터슨이 사실 거짓말쟁이 살인자라고 믿는다고 해도 캐릭터의 재미는 여전합니다. 평생동안 주변 사람들을 철저하게 속아 넘겨 온 연기력 만렙의 싸이코패스 살인마가 되는 거니까요. 종류는 달라질 지언정 지켜보는 재미는 확실하겠죠.


 피터슨을 오랫동안 돕는 저 변호사 아저씨도 참 괜찮은 캐릭터(?)입니다. 뭐 돈 받고 일하는 프로이긴 하지만 받은 돈값 이상을 해주려고 노력하는 게 확확 보이는 사람이고. 또 막판의 전개를 보면 (뭐 유명세를 얻기 위해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인간적인 한계를 보이면서도 피터슨의 인생에 진정으로 도움이 되어주는 훌륭한 고용인이거든요. 둘이서 주고 받고 하는 드립들도 훈훈하게 재밌구요.



 - 결론적으로.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는 무조건 기피하는 분들이 아니시라면 모두 한 번 보실만한 '재미있는' 다큐멘터리였습니다.

 이 나이, 제 처지에 이런 거 알아서 뭐하나 싶은 미국 사법제도에 대해서도 많은 걸 알게 해주고요.

 동시에 인간극장스런 재미도 꽤 세련된 형태로 전해 주고요.

 전 원래 다큐는 잘 안 보는 사람인데 어쩌다 아무 생각 없이 1화를 눌렀다가 그만 끝까지 다 봐 버렸네요. ㅋㅋㅋ




 + 이 다큐의 또 한 가지 재미는 15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변호사들의 스킬이 늘고 변화하는 걸 구경하는 겁니다. 결과와는 별개로(?) 후반 에피소드들에 보이는 변호사들이 확실히 더 능력 있어 보이거든요. 바꿔 말하자면 초반 재판에서는 저 훈훈한 변호사 아저씨가 전략적으로나 기술적으로 모자란 부분들이 많았다는 건데, 그게 순서대로 보고 있으면 초반엔 전혀 안 그래 보입니다. 


 ++ 혹시 이 다큐를 보실 분들이라면 끝까지 다 보시기 전에는 이 사건에 대해서 검색해보지는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아무래도 그냥 실제 사건이다 보니 검색 즉시 스포일러가 팡팡 터지거든요. ㅋㅋ


 +++ 다시 강조하지만 '피터슨의 진실과 관계 없이', 이 재판에는 분명한 죄를 저지른 빌런들이 다수 존재하는데... 다 보고 나서 검색을 해 보니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더군요. 그 중 가장 심했던 놈은 해고되긴 했는데 바로 같은 직장에서 다른 일 담당으로 채용이 되어 잘 먹고 잘 살고 있구요. 역시 사람 사는 데는 다 비슷한가 봅니다(?)

 

 ++++ 도대체 15년동안 이 다큐 감독은 이거 찍으면서 뭘로 먹고 살았지? 라는 생각을 했는데. 지금 넷플릭스에 있는 게 말하자면 '최종판'이고 중간중간 이런저런 형태로 공개를 했었나 보더라구요. 그래도 여전히 신기한 건 이 감독의 센스입니다. 보면 거의 사건 초반부터 이미 따라다니며 촬영을 하고 있거든요. 뭐 그땐 이게 이렇게 장대한 드라마가 되리라는 건 모르고 그냥 유명인 관련 사건이라 그랬겠습니다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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