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BO] 체르노빌 (스포일러?)

2019.06.12 16:03

겨자 조회 수:1056

압도적으로 뛰어난 미니시리즈가 없느냐고 친구에게 물어봤더니 '체르노빌'을 추천해주더군요. 분명 질적으로 뛰어난 미니시리즈일 거라고 생각은 했어요. 안 그러면 HBO에서 이렇게 확신을 갖고 마케팅을 세게 할 리가 없죠. 소재도 잘 잡았다 싶었어요. 드라마틱하고, 무시할 수 없는 소재죠. 하지만 누가 그런 이야기를 보고 싶어하겠어요?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어하죠. 체르노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건, 곧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에너지에 대해서 고찰하는 것이고, 외부에서 뿐 아니라 내부에서도 무슨 일이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면서 의사 결정을 내리는 불투명성한 조직, 무능력하고 일이 저절로 해결되기를 기대하는 상급 관리자, 아래 위로 쪼이는 중간관리자, 목숨으로 수습하는 조직원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면서 희생당한 민간인들, 되돌릴 수 없는 시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이 친구가 여러번 '체르노빌'을 이야기하니 아무래도 한 번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게다가 러시아에서 자신들 버전의 '체르노빌' 미니시리즈를 만들겠다잖아요? 그것도 CIA, 즉 미국에서 사보타지 했기 때문에 체르노빌 사건이 일어났다는 내용으로요. 이것처럼 좋은 마케팅이 없죠. 러시아인더러 원본을 보라고 홍보해준 거나 마찬가지예요. 만일 HBO '체르노빌'이 뼈아프지 않았다면 이런 오버를 할 필요가 없죠. 


에피소드 1은 발레리 레가소프의 자살로 시작합니다. 자살로 시작했기 때문에 이 시리즈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아니예요. 이 사람이 자살하는 전후로 카메라는 시계를 클로즈업 하는데, 이 시계가 정말 80년대에 소련에서 있었을 법한 디자인이예요. 이 사람들 이것까지 신경썼다면 다른 건 볼 필요도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에피소드 3에서 꼭 봐야할 부분은 광부들과 관료의 대화 부분입니다. 총알로 백명의 광부를 다 죽일 수 있냐면서, 우리가 지금 실려가는 곳에 대해서 말하라고 요구하죠. 나중에 가면 조직에서 필요한 장비를 지급해주지 않아서 갱내가 너무 더워, 모자와 신발만 신고 누드로 땅굴을 팝니다. 관료(보리스 슈체르비나)와 과학자(발레리 레가소프)가 거짓말 하고 있다는 것, 죽을 거라는 걸 알면서 광부들의 리더는 작업을 수행합니다. 이들과 대등한 입장에서 대화하면서요. 이 부분은 아마 건축업에서 일하신 분들이면 어떤 느낌인지 확 이해가 되실 거예요. 에피소드 3에서 소방수들이 모스끄바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 어떤 악몽도 현실만큼 무시무시하지는 않다는 걸 실감하게 됩니다.


에피소드 4는 가축 도살 장면과 바이오 로봇 (90초씩 나눠 일하는 구 소련의 젊은이들)으로 유명합니다. 체르노빌 사건으로 인해 30만명의 거주민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야했죠. 한국은 인구가 5천백만명이 넘고, 창원만 해도 인구 백만이 넘기 때문에 30만이 작은 숫자로 보일 수도 있지만, 현재 아이슬란드 인구가 34만명 정도 되니까 한 나라가 통째로 이주한 것입니다. 예전에 '일본 침몰'이라는 소설책이 있었는데, 일본이 바다 속으로 침몰해서 인간과 문화재를 옮기는 대형 프로젝트가 나와요. 일본 인구만은 못하지만 실제로 '국민 들어 옮기기'는 인류 역사 속에 존재했던 거죠. 이렇게 인구를 소개(疏開)하면서 오염지역 동물은 살처분했는데, 죄없는 짐승이 죽는 이 부분이 특히 보기 어려웠다고 하는 분들도 있네요. 에피소드 4의 바이오 로봇 (사람이 90초씩 돌아가며 체르노빌 발전소 지붕에 올라가 흑연 감속재를 지붕 아래로 떨어뜨림)이 또 무시무시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에 번역본이 나와 있는 그레이엄 앨리슨의 책 '결정의 본질' 에 보면, 쿠바 미사일 위기를 논합니다. 조직은 합리적 모델, 조직 프로세스의 모델, 정치에 기반한 의사결정 모델 세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생각보다 그렇게 합리적으로 조직이 돌아가지 않고 엉망진창 진행되는 것 같더라 이런 이야기죠. 이게 핵 미사일을 주관하는 중요한 조직에도 적용이 된다. 조직이 합리적으로 돌아갈 거라는 기대는 위험하다. 조직의 한계를 인정하고 신중히 다뤄야 한다. 이런 이야기인데요. 최근에 찰리 멍거가 인터뷰를 통해서 자기는 현 상황에서 지구 온난화보다 핵 전쟁이 더 무섭다,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합리적이지 않은 리더들이 끌고 나가는 비합리적인 큰 조직들이 맞붙으면,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 수 있죠.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결정의 본질'과 같이 보면 더 좋을 것 같네요.


이 미니시리즈로 인해서 체르노빌 관광객이 늘었다고 하네요. 버려진 버스 앞에서 관광객들이 셀피 찍는다고 해요. 아 물론 이 미니시리즈에 흠이 없느냐. 네 알아요... "엄마 뱃속의 아기가 방사능을 흡수해서 엄마가 살았다"는 표현이 말이 안된다는 거. 그리고 죽은 소방관 옆에서 임신기간을 보낸 아내가 낳은 아기를 부검하지도 않았다는 거. 그러나 별로 중요하지 않은 지적이다 싶구요. 


HBO 미니시리즈 '체르노빌'은 시청자의 눈물이나 격분을 구걸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합니다. 이런 류의 진실이 그러하듯이, 처음에는 보기 힘들지만, 일단 보기 시작하면 눈을 뗄 수 없고 쉽게 뇌리에서 지우기도 힘든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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