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신사바] 각색하기

2010.03.06 11:11

DJUNA 조회 수:7458

([분신사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며칠 전에 이종호의 [분신사바]를 끝냈습니다. 이제 영화와 원작을 비교해가며 각색 과정에 대해 몇 마디 할 자격이 생긴 셈이죠. 물론 전 여전히 이상적인 독자는 못됩니다. [분신사바]의 원래 버전인 [모녀귀]를 읽은 적이 없고 영화를 먼저 본 뒤 읽었기 때문에 소설을 독자적인 작품으로 보질 못하고 팬들의 반응을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하거든요. 그래도 이 정도면 몇 마디 할 자격은 된다고 봅니다.

일단 안병기의 각본이 소설 [분신사바]를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지 지적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영화는 소설 기둥 줄거리를 비교적 충실하게 따라갑니다. 하지만 효과를 위해 몇몇 설정과 후반 사건들을 바꾸었죠. 남녀공학이었던 학교는 여고로 바뀌었고 몇몇 남자 등장인물들도 성전환했습니다. 소설에서는 춘희와 인숙의 령이 마을을 떠나고 은주도 죽지만 영화에서는 거의 춘희와 인숙에 대한 완벽한 복수를 한 은주가 다시 태어난 인숙과 새 삶을 시작하는 해피 엔딩(!)으로 끝납니다.

소설을 읽고나니 원작자가 각본에 만족했던 이유가 이해됩니다. 원작의 팬들이 영화를 관대하게 봤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고요. 영화는 비교적 소설의 내용에 충실하고 거기서 최대한의 효과를 끌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대사들은 여전히 형편없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몇몇 장면들의 묘사는 심지어 소설보다 낫습니다. 왕따당하는 아이들의 심정의 묘사는 비교적 냉랭하게 묘사된 소설보다 강해요. 유진의 캐릭터 묘사도 소설보다 나은데, 그건 이세은의 노력을 칭찬해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결말 역시 영화 쪽의 선택이 소설보다 낫게 느껴집니다. 소설의 결말은 저에겐 그냥 어정쩡했어요. 충분히 사악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의도한 모럴을 제대로 전달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소설을 읽은 뒤 안병기의 영화에 대한 제 평가가 바뀌었다는 말일까요? 아뇨, 그건 아닙니다. [분신사바]는 여전히 문제가 많은 영화입니다.

뭐가 문제였을까요? 일단 전 기획의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호러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이 한국 호러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의 대표작을 각색한다'라는 설정 자체가 지나치게 손쉬운 생각이었던 것이죠. [분신사바]는 영화화되어 안정된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소설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지금은 때가 아니었어요.

왜냐고요? 전 올해 들어 사다코를 흉내내는 한국 호러 영화 이야기를 죽도록 했습니다. 자, 그렇다면 다음 문장들을 한 번 읽어보세요. [분신사바] 25페이지 끝부분입니다.

"은주는 그것이 여자라고 생각했다. 실내 배경과 동떨어진 분위기를 지녀 전혀 이 세상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는 여자가 까맣고 긴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덮은 채 그녀를 보고 있었다. 눈동자가 전혀 보이지 않음에도 그 머리카락 사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숨이 막힐 정도의 집요한 시선이 따갑게 전해졌다."

소설은 이런 묘사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원작소설을 충실하게 영화로 옮기려는 감독이 사다코 흉내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요?

도입부에 나오는 볼펜 점 장면은 어떻습니까? 네, 소설에서는 [여고괴담]을 간접적으로 인용하며 그 진부함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소설만이라면 이 정도로 충분하지요.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 장면이 그대로 영화화되면 [여고괴담]의 위트없는 직접 인용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분신사바]는 이 영화의 제목이기까지 합니다!

안병기가 이 문제점을 더 부풀린 건 사실입니다. 원작이 지닌 잠재적 유사점을 노골적인 사다코 흉내로 고정시켜버렸으니까요. 원작의 남녀공학을 여고로 바꾼 것도 문제였습니다. 효과를 내기 더 좋다고 생각했을지는 몰라도 이 작은 터치 때문에 영화 전체가 [여고괴담] 류의 아류로 떨어지는 건 자연스러운 결과였지요. 게다가 이런 전환은 한 마을 전체에 떨어진 저주라는 이야기의 설정과도 그렇게 잘 맞는 편이 아닙니다. 남자아이들도 같은 수로 등장해야 해요.

어떻게 해야 했던 걸까요? 제가 알 턱이 없죠. 하지만 몇몇 가설과 대안을 제시하는 정도의 일은 할 수 있을 겁니다.

가장 쉽게 말할 수 있는 건 역시 이 원작으로 영화를 만들지 말아야 했다는 것입니다. '최고 호러 감독과 최고 호러 소설의 만남'이라는 이벤트에 홀려서도 안되었고요. 안병기의 가장 큰 실수는 그 이벤트의 무게에 홀려 이 영화를 너무 심각하고 뻣뻣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장르 문학과 영화의 결합을 시도하고 싶었다면 다른 작품들을 고르는 편이 더 나았을 겁니다. 소재부터 분명히 차별화되고 양이 조금 짧은 작품으로요. 감독이 충분한 여유를 갖고 자기 비전을 투영할 수 있을 정도로 짧은 단편이면 이상적이었겠죠. 물론 이벤트 효과는 떨어집니다. 하지만 이번 기획에서 가장 큰 문제는 이벤트 자체였어요.

그래도 정말 [분신사바] 또는 [모녀귀]를 각색하고 싶었다면? 전 영화보다 미니 시리즈가 더 나은 해결책이었다고 주장하겠습니다. 적어도 [분신사바]는 미니 시리즈의 형식에서 더 나은 각색물을 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정말 그런 기획을 성사시킬 여건이 갖추어진다면 말이죠.

이유를 설명해보죠. 러닝타임은 프루크루스테스의 침대와 같습니다. 특정 문학 작품을 영화로 각색하려면 2시간 안팎의 짧은 시간 안에 과연 그 소설의 핵심 요소들을 다 담아낼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 중 얼마나 원작에 충실해야 하는지도요.

그런데 소설 [분신사바]는 그게 어렵습니다. 소설이 특별히 길지는 않아요. 큐브릭이 훌륭한 장편 영화로 각색한 [샤이닝]의 절반 정도입니다. 하지만 여기엔 결정적인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분신사바]에서 벌어지는 사건 대부분이 표면적이고 단순하다는 것이죠. 미스터리로 시작하지만 기본 미스터리를 풀고나면 특별히 모호한 구석도 없어요. 따라서 영화 속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사건들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처럼 단순하고 분해될 수 없는 벽돌 자체로요.

그 결과 각본가는 러닝타임이 어떻게 되건 이들을 될 수 있는 한 많이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분주해져버리죠. 여백이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호러 영화에서 여백은 중요합니다. 어떻게 보면 잘 짜여진 내러티브보다 더 중요하지요. 내러티브는 훌륭한 호러 영화의 필수 요건은 아닙니다.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상관없죠. 하지만 내러티브를 넘어서는 여백이 존재하지 않는 영화는 훌륭한 호러 영화가 될 수 없습니다. 이건 절대적인 법칙입니다.

다시 [샤이닝]의 예를 들겠습니다. 스티븐 킹의 소설은 느슨하고 입체적이며 다의적입니다. 독자들은 이 소설을 귀신들린 집에 대한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고 고립된 호텔에서 서서히 미쳐가는 남자의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이 둘을 모두 취한다고 해서 잘못인 것도 아니고요. 킹이 독자들을 공포로 몰아넣기 위해 사용하는 사건들 역시 모두 느슨한 시적 모호함을 담고 있으며 어느 순간부터 논리를 넘어섭니다. 하나의 사건이 한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고 명료한 논리구조 안에 갇혀 있지 않기 때문에 킹의 소설에 나오는 호텔과 유령들은 영화적으로 번역될 수 있는 가능성이 무한합니다. 큐브릭의 영화가 바로 그 증거인 것입니다. 원작가 킹이 큐브릭의 영화를 싫어한다는 건 오히려 그 가능성의 범위를 증명할 뿐입니다.

여백이 없다면 만들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원작에서 아주 기본 구조만 취하고 처음부터 다시 쓰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건 '각본의 미진함을 보완하기 위해 팬들에게 인정받은 소설을 취한다'는 기획과 어긋납니다. 이럴 거라면 처음부터 그런 기획을 할 필요가 없죠. 두 번째 방법은 그런 여백을 만들 수 있을만큼 여유있는 러닝타임을 택하는 것입니다.

시간 여유가 생기면 우린 [분신사바]의 이야기를 더 풍요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소설 [분신사바]는 디테일이 비교적 약한 작품입니다. 유진, 은주, 재훈은 모두 자기만의 개성이 부족한 얄팍한 꼭두각시에 불과하죠. 이들의 심리묘사도 환경과 자극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을 기술한 것에 불과하고요. 조연들로 넘어가면 이름과 역할을 연결시키는 것 자체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의심나신다면 한 번 주인공 중 한 명인 유진을 검토해보세요. 서울에서 시골마을로 이사왔고 왕따를 당하고 있고 볼펜점을 시도할만한 담력과 추진력이 있는 고등학생이라는 것만으로 캐릭터 전체가 설명됩니다. 유진의 존재는 플롯 안에서 완벽하게 기능하고 있지만 그 뿐입니다.

모든 소설 캐릭터들이 입체적이거나 개성적일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분신사바] 정도로 많은 사건을 담고 있고 30여년이라는 긴 세월을 커버하는 장편소설이라면 캐릭터의 개성을 어느 정도 살려주는 편이 이야기에 도움이 됩니다. 지금은 캐릭터들이 무슨 일을 당해도 무덤덤하게 바라볼 정도니까요. 이건 소설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영화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미니 시리즈는 이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들에게 그들만의 이야기와 개성을 새로 만들어 추가할 수 있는 것이죠. 등장인물들이 배우들의 가면 대신 고유의 얼굴을 얻을 수 있다면 관객/시청자의 몰입도도 더 커질 것입니다. 영화에서는 묘사 자체가 거의 없고 소설은 아주 기초적인 기술에 머물고 있는 심리 묘사도 더 섬세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리즈는 소재가 가진 기본적인 공포물의 설정에 자기만의 분위기와 질을 부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훌륭한 호러물을 특징짓는 것은 강도가 아니라 고유의 질인 것입니다. 잭 토렌스가 흥미진진한 괴물인 건 그가 (실패한) 도끼 살인마여서가 아니라 '놀지않고 일만하면 바보 된다'를 기계적으로 타자하는 그에게서 실패한 작가와 위신잃은 가부장의 절망감을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사못 회전]이 흥미진진한 건 사악한 유령들이 아이들을 노리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아이들을 보호하고 유령들을 저주하는 가정 교사의 정신 상태에서 광기의 흔적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검은 고양이]의 결말이 그처럼 전율적인 것은 그 말도 안되는 설명이 화자인 주정뱅이 살인범의 위태로운 정신 세계와 완벽하게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긴 러닝타임은 이 영화의 무대인 Y읍에 자기만의 개성을 부여해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소설이나 영화에서 Y읍은 그냥 폐쇄적인 마을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두 모녀가 마을 전체와 싸운다는 이야기에서 이건 지나치게 무개성적인 설정이죠. 소설과 영화의 Y읍은 왕따의 심리학에 대한 일반론을 기술하는 데에는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집단 심리학에 대한 논문을 쓰는 게 아니라면 일반론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영화에서는 Y읍을 구체적인 존재로 살릴만한 묘사가 없고 소설은 설명만 나열하고 있지요. 새로운 일화와 캐릭터들을 삽입하고 시청자들에게 마을의 지리를 익힐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하다면 마을은 자기만의 의지와 개성을 가진 괴물로 살아날 수 있을 겁니다.

시리즈는 원작에서 이해하기 힘들었던 사건들이나 행동들에 대한 대안을 찾을 수도 있을 겁니다. 영화나 소설은 춘희 모녀가 왜 그렇게 적대적인 마을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는지 설명하지 못합니다. Y읍 사람들이 다섯 명이나 모여 있던 수수께끼의 학과에 대해서는 정말 할 말이 없고요.

영화적 재미는 어느 정도 줄어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쪽을 얻으려면 다른 한 쪽은 희생해야 합니다. 이야기꾼에게 텔레비전 시리즈는 영화보다 훨씬 친절한 장르입니다. 그리고 영화적 표현이 기껏해야 사다코 흉내로 끝나버리는 이 소설에서 중요한 건 이야기 자체입니다. 일단 중요한 것부터 살리고 봐야 한다는 것이죠. 또 누가 압니까? 새로 늘어난 이야기와 캐릭터들이 자기만의 표현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겁니다.

공포 효과는 오히려 더 클 수도 있습니다. 텔레비전은 종종 이럴 때 영화보다 더 낫습니다. 기술적으로는 떨어져도 그 투박함과 즉물성이 더 자극적으로 와닿을 수 있는 거죠. 아마 이 중에서도 [전설의 고향]이나 [토요 미스터리 극장]을 보며 공포에 떨었던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이 가상의 미니 시리즈도 그런 작품이 되지 말라는 법 있나요? 물론 실패하면 [M]의 수준으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재미있어하며 [M]을 열심히 봤죠. 그리고 설마 그 정도까지 떨어질 리야 있겠어요? (04/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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