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속의 네안데르탈인

2010.02.05 22:05

DJUNA 조회 수:6105

1.

장 자크 아노의 81년도 영화 [불을 찾아서]는, 무시무시하고 야만적인 털복숭이 아인종의 습격을 받아 불을 꺼뜨리고 만 원시인들이 불을 찾아 떠나는 모험을 그리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영화죠. 하지만 지금은 영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생각해봅시다. 영화 속의 원시인들은 누구고, 털복숭이 아인종들은 또 누구인가요? 영화의 무대는 아마도 유럽입니다. 아마도 빙하기인지 별로 따뜻하지는 않군요. 주인공 원시인들은 대충 말을 할 줄 알고, 영화 후반부에 만난 흑인 종족은 현생 인류와 해부학적 차이가 없습니다. 그리고 털복숭이 아인종과 원시인들이 같은 대륙에서 공존했다면?

답: 그 무식하게 생긴 원시인들은 크로마뇽인들이고, 털복숭이 야만인들은 네안데르탈인들입니다. 해부학적으로 조금 미심쩍긴 하지만 (크로마뇽인들은 현대의 유럽인들과 해부학적으로 그렇게 다르지 않았고 네안데르탈인들도 영화에서 나오는 것 같은 털복숭이 괴물은 아니었으니까요) 대충 이렇게 해두는 편이 낫겠지요.

흠, 이러니까 조금 불쾌해지는군요. 가장 큰 이유는 장 자크 아노가 이미 한 물 간 네안데르탈인들의 이미지를 81년에 와서도 그대로 차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원작이 한물 간 소설이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 물론 우리는 네안데르탈인들이 정말로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현대학자들(특히 로버트 애들리)의 의견은 그런 불쾌한 기분에 나름대로 정당한 원인을 제공합니다.

2.

[불을 찾아서]이 만들어지기 25년 전인 1955년에 윌리엄 골딩의 [후계자들]이 쓰여졌습니다. 그가 [파리 대왕]으로 히트를 친 바로 다음 해였죠. 겨우 28일만에 썼다고 하지만, 지금 이 작품은 [파리 대왕]과 함께 골딩의 대표작으로 남아있습니다. 적어도 골딩은 [파리 대왕]보다 이 작품을 더 걸작으로 생각했던 모양이에요.

골딩이 이 소설에서 다루는 시대는 [불을 찾아서]와 같습니다. 하지만 입장은 완전히 바뀌었어요. 골딩의 소설에서도 두 종족의 해부학적 차이는 과장되어 묘사되지만, 평화스러운 주인공들은 네안데르탈인들이며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악당들은 크로마뇽인들입니다. 골딩은, 지능이 조금 딸리기는 하지만 자연에 아름답게 적응하며 사랑과 시적 상상력으로 충만된 삶을 사는 '사람들'과 머리는 좋지만 공격본능과 불신, 증오에 얽매인 '새 사람들'을 비교하며 그들의 첫만남을 서글프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만남이 서글픈 것은, 그 만남의 결과가 이미 그 속에 이미 녹아있기 때문입니다. 잊지 않았겠죠? 네안데르탈인들은 멸종했고 크로마뇽인들은 살아남았어요. 그렇다면 누가 '착한' 쪽인지 생각해보세요, 아하!

그렇다면 왜 네안데르탈인들이 잔인한 야만인들이라는 구식 이론이 그렇게 인기가 있었을까요? 이유 하나, 그들은 (우리가 보기에) 못생겼습니다. 이유 둘, 인간은 '열등한' 종족으로부터 진화했습니다. 따라서 그들보다 열등한 종족은 도덕적으로도 열등했음이 분명하다는 것이죠. 우리는 아더 코난 도일의 소설 [잃어버린 세계]에서 그 끔찍한 단정의 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 야만스러운 피테칸트로푸스는 온순한 호모 사피엔스를 살육하고 잡아먹습니다. 나중에 영국에서 온 탐사대는 호모 사피엔스들을 도와서 피테칸트로푸스를 멸종시킵니다!

[후계자들]은 선사소설이라는 SF의 서브 장르에 속해 있는 작품이지만, 골딩이 네안데르탈인들과 크로마뇽인들의 만남을 '과학적 상상력'으로 재현하려는 데 별 관심이 없었다는 점은 지적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근원적인 악과 어쩔 수 없이 그에 의해 지배될 수밖에 없는 인간 조건은 골딩의 일관된 주제였습니다. 이러한 주제를 구체화하는 데, 문명으로 오르기 위해, 평화로운 열등 종족을 멸종시킨 이 끔찍한 시대만큼 적절한 배경이 어디 있을까요? 골딩의 다른 소설과 마찬가지로 [후계자들] 역시 우화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3.

골딩이 핵폭탄과 아우슈비츠를 만든 종족들에 대해 비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면 당연한 일입니다. 20세기를 넘어오면서,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족에 대한 비관적인 견해는 점점 도를 더해가고 있으며 지금도 그 과정은 진행 중에 있습니다.

자기 혐오는 필연적으로 다른 존재의 미화를 가져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예를 들어보죠. 서부 개척자들과 서부 영화 제작자들에게 그들은 정복당하고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요. '야만인 인디언들'이 나오는 구식 서부 영화가 만들어진다면, 그 제작자는 돌에 맞아 죽을 것입니다. 대신 최근에 등장하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디즈니 영화 [포카혼타스]에 나오는 것처럼 자연에 순응하고 화기애애하며....

흠. 그러보고니 저는 아까 써먹은 네안데르탈인들에 대한 묘사를 그대로 쓰고 있군요. 당연하죠. 골딩의 네안데르탈인들에 대한 묘사는 결국 같은 미화에서 출발하고 있으니까요. 네안데르탈인들이 어떤 종족이었는지 골딩이라고 어떻게 알았겠어요.

구닥다리 루소주의의 잔재인 이 원시 예찬은, 아까의 털복숭이 야만인 상과 마찬가지로, 편견과 부족한 인류학 지식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네안데르탈인들이 골딩이 묘사했던 것처럼 원시적이었을 이유도 없습니다. 실제로 그들의 뇌용량은 호모 사피엔스보다 컸으니까요. 게다가 같은 원숭이인데 그네들이라도 특별히 온순하라는 법이 어디 있죠? 침팬지들이 그네들의 '전쟁' 도중 저지르는 다양한 끔찍한 행위를 제인 구달이 학계에 보고한 뒤로, 인간만 못돼먹었다는 그 좋았던 환상도 사라졌습니다.

다시 다양한 학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합니다. 로버트 애들리의 '사악한 현대인'과 '온순한 네안데르탈인'설도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었지만, 그 밖의 다양한 설도 많았죠. 다른 세계에서 온 침략자와 네안데르탈 인들이 교잡해서 현생 인류가 생겼다, 네안데르탈 인들이 경쟁에 밀려 멸종하기는 했지만, 호모 사피엔스가 학살한 게 아니라 단지 생태학적으로 교체된 것이다, 심지어 네안데르탈인은 우리의 '조상'이다....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이들 중 몇몇은 사라졌지만(DNA 감식법을 동원한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네안데르탈 인들이 우리의 조상이거나 가까운 친척일 가능성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몇몇은 아직도 남아서 교과서 편찬자들을 헛갈리게 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다양한 학설들이 난립하는 것일까요? 미시간 대학의 인류학자 홀리 스미스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네안데르탈인을 대하는 것은 거울을 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라고 생각하는 대상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스미스의 의견은 선사 소설을 이해하는 데 더 적절하게 이용될 수 있습니다. 음울한 비관론자인 골딩이, 착한 네안데르탈인들이 못돼먹은 현생인류에게 멸종되는 이야기를 쓴 것 부터 그 사실을 증명하지 않나요? 열정적인 진화론자인 아더 C. 클라크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외계인의 도움을 받아 진화의 첫발을 내딛는 원시인들을 다룬 것도 그렇고. [잃어버린 세계]에서 무자비하게 피테칸트로푸스를 멸종시키는 주인공들에서, 우리는 아마도 보어 전쟁을 지지해 기사 작위까지 받았던 코난 도일의 호전적 제국주의가 남긴 흔적을 읽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최근 쓰여진 두 편의 네안데르탈인 관련 소설들을 봅시다. 마이클 크라이튼의 [시체를 먹는 자들]은 중세까지 살아남은 네안데르탈인과 바이킹과의 전쟁을 다룬 소설인데, 이 작품에 나오는 네안데르탈인은 [불을 찾아서]에 나오는 괴물들과 별 다를 게 없습니다. 반대로 존 단튼의 [네안데르탈]에서 살아남은 네안데르탈인들은 자연에 순응하고... 기타 등등인 착한 야만인일 뿐만 아니라 초능력까지 쓸 줄 압니다! 결국 네안데르탈 인이 발견된 지 1세기가 넘은 지금에 와서도 의견 일치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러는 동안 연구자들과 소설가들은 자기 인간성만 폭로당하고 만 셈입니다.

진실은 아마도 양극단 사이의 어딘가에 놓여있겠지만, 가까운 시기에 이 다양한 의견들이 수렴될 가능성은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후대의 문학사가들은 20세기가 얼마나 혼란스럽고 중심없는 세계였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이 소설들을 인용하며 즐거워하겠지요. (98/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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