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잎새]와 보스턴 결혼

2010.02.05 22:06

DJUNA 조회 수:10496

1.

모두가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죽어가는 여자 이웃의 마지막 희망을 꺾지 않기 위해 담벼락에 떨어지지 않는 담쟁이 잎을 그려넣고 죽어간 늙은 화가의 이야기. 너무 많이 들어서 조금 뻔하긴 하지만 그 놀라운 희생은 여전히 감동적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 [마지막 잎새]를 보고 동성애 소설이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답을 먼저 말한다면, 오 헨리는 동성애 소설같은 건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렇게 진보적이지도 미래지향적이지도 과격하지도 않은 남자였지요. 누군가가 그에게 [마지막 잎새]를 동성애 소설로 썼냐고 물었다면 그는 정말로 정말로 놀랐을 겁니다.

그러나 [마지막 잎새]를 자세히 읽어보면 재미있는 점들이 여럿 발견됩니다. 지금부터 차근차근 열거해볼테니, 친절한 베이먼 노인의 희생은 잠시 잊고 한 번 살펴보시길.

우선 두 여주인공의 이름을 보죠. 메인 주에서 온 아가씨 이름은 수(Sue)이고 캘리포니아에서 온 아가씨 이름은 조안나(Joanna)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서로에게 붙인 애칭은 수디(Sudie)와 존시(Johnsy)군요. 보시다시피 모두 살짝 중성으로 옮겨져 있죠.

여기까지는 이상하지 않아요. 여성 이름 애칭들 중 상당수가 중성적이거나 남성형이니까요 (가장 대표적인 예: Samantha-->Sam.) 하지만 오 헨리가 그들에게 부여한 성격을 보면 그 둘에게 나름대로의 성역할이 주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메인주에서 온 씩씩한 수와 병약한 캘리포니아 출신 아가씨 존시는 상당히 뚜렷하게 남녀 이미지로 구별되고 있죠.

그래서 뭐? 그게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요? 물론 여기까지는 아닙니다. 그러나 수와 의사가 나누는 다음과 같은 대화는 조금 재미있군요.

"...당신의 작은 아가씨는 이제 낫지 않는다고 아예 마음먹고 있어요. 저 아가씨가 뭔가 마음에 두고 있는 게 있나요?"

"저애는 언젠가 나폴리의 해안을 그리고 싶어해요."

"그림? 바보같이! 그것말고 뭔가 진지하게 생각할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은 없습니까? 예를 들어 남자 친구 같은 것 말이오."

"남자요?" 수는 유태 하프와 같은 소리를 냈다. "남자가 그럴 만한 값어치가... 아뇨, 선생님 그런 건 없어요."

이 대화는 두 가지 의미로 읽힙니다. 첫째, 우리의 두 주인공들이, 화가라는 자신의 직업을 아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파릇파릇한 20세기 초(이 소설은 1906년 스트랜드 매거진에 처음으로 발표되었습니다)에 '남자친구'보다 자기 직업을 더 진지하게 생각하는 여성들의 묘사는 상당히 발전적인 것이었겠지요. 둘째, 그들은 정서적인 만족감을 위해 굳이 남자들이 필요하지가 않았습니다.

게다가 오 헨리는 이들의 정서적인 관계를 아주 진지하고 깊이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어서 소설은 더 재미가 있어집니다. 그네들이 정말 동성애 관계였건 아니었건 그들에게 서로가 아주 중요한 존재였음은 소설 전체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죠.

2.

오 헨리의 일련의 작품들과 함께 본다면, [마지막 잎새]는 오 헨리가 즐겨 소재로 다루었던 '도시의 여자들'을 등장시킨 또다른 단편에 불과합니다. 친절하고 동정심많은 남자였던 그는 뉴욕이라는 무시무시한 괴물의 입 속에 뛰어들어 힘겹게 자신의 삶을 이어가는 젊은 직장 여성들을 애정어린 눈으로 바라보았고 그들을 주인공으로 한 수많은 소설들을 남겼습니다. 사회적 변화에 대한 그의 인식은 그렇게 깊은 편이 아니었으며 그의 소설들은 대부분 개인 단위의 이야기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정확한 관찰자였기 때문에, 남발되는 감상주의와 거의 경박해보이기까지하는 반전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들은 종종 놀랄 정도로 정곡을 찌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소설이 진짜로 재미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죠. 그의 관찰은 종종 그의 이해를 넘어섭니다.

'도시의 여자들' 이야기들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 헨리는 힙겹게 사회생활을 이어가는 여성들만 보았지만, 바로 그 '직장 여성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당시 세상이 얼마나 대단하게 발전하고 있는지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예였습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여성이 막 사회에 진출하고 참정권을 얻으려 돌진하는 바로 그런 때였지요. 타이피스트나 비서같은 간단한 직업에 한정되어 있었지만, 경제적으로 독립된 여성들이 그렇게까지 늘어난 건 역사상 유래없는 일이었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알았다면, 그도 좀 긴장했을지 모르죠.

수와 존시의 '결혼생활'도 그런 변화 중 일부였습니다. '결혼'이라는 표현은 과장이 아닙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런 라이프 스타일을 '보스턴 결혼 Boston Marriage'이라고 불렀지요. 이 표현은 19세기 말 뉴 잉글랜드에서 생겼는데, 함께 살면서 마치 결혼한 커플처럼 장기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두 여성들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페미니스트거나 교육받은 '신여성' 또는 예술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동성애 관계였을까요? 일부는 아니었지만 일부는 그랬습니다. 오 헨리보다 더 통찰력이 뛰어났던 작가 헨리 제임스는 그의 [보스턴 사람들(1885)]에서 이와 같은 관계들을 보다 명확하게 그려내고 있지요.

[마지막 잎새]의 두 주인공을 다루는 방법에도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관찰력과 무지가 동시에 숨어있습니다. 오 헨리는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수와 존시의 삶이 가벼운 대사 수준까지 그렇게 정확하게 묘사된 일차적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죠. 그러나 그는 그들의 삶에 숨어 있는 페미니즘적인 또는 동성애적인 요소까지 보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마지막 잎새]는 그의 자기 검열에서 너무나도 손쉽게 빠져 나갔던 것이죠. 20세기 초를 살던 평범하고 상식적인 남자였던 그가, 자신이 동성애 커플일지도 모르는 여자들을 묘사하고 있는 줄 알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이야기는 바뀌었을지도 모릅니다. 바로 아래처럼 말이죠.

3.

이 글을 읽는 분들 중 대부분은,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마지막 잎새]의 시나리오 각색물에 밑줄을 쫙쫙 그으면서 외우던 경험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이 글의 나머지는 바로 그 각색물에 할애해보죠.

교과서에는 그것이 국내 각색물이라고 나와있지만, 그건 거짓말입니다. 적어도 잘못된 정보죠. 왜냐하면 그 작품은 1952년에 발표된 [오 헨리의 풀 하우스 O. Henry's Full House]라는 할리우드 영화를 위해 쓰여진 대본을 번역한 것에 불과하니까요. 이 영화는 오 헨리의 원작 5개를 뽑아 5명의 감독들이 연출한 옴니버스 영화였습니다. 마지막 에피소드였던 [마지막 잎새] 부분은 진 네그레스코가 감독했고 앤 박스터와 진 피터즈가 출연했습니다.

만약 제가 첫번째 도막에서 언급한 몇몇 '증거'들을 보고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이 각색을 검토해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한참 피어오르던 페미니즘 운동이 겁먹은 남자들에게 꽝꽝 짓밟히고 있던 그 갑갑한 50년대에 쓰여진 이 각색에서는 동성애와 페미니즘 암시하는 부분들은 의도적으로 싹싹 지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이름이 수잔과 조안나로 다시 원상복귀했지요. 그들은 룸메이트가 아니라 자매입니다. 게다가 조안나가 병에 든 건, 어떤 남자에게 차여서 그런 거라네요. 그것만으로도 모자랐는지, 이 영화에서 수잔(피터즈)는 병을 앓고 있는 조안나에게 이상할 정도로 차갑게 굽니다. 게다가 조안나의 그림에 대한 열정은 도대체 어디로 갔는지요?

결국, 우리는 오 헨리가 친절하고 이해심깊은 남자라는 것 말고도 그의 무지에 감사를 드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가 필요 이상으로 똑똑했다면 [마지막 잎새]는 깜짝쇼로 끝나는 감상적인 자선의 이야기로 끝나버렸을지도 모르니까요. (98/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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