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3.20 21:55
온스타일에서 하는 [대디‘s 스포일드 리틀 걸]을 보면 어이가 없습니다. 솔직히 컨셉도 이해를 못하겠어요. 우리가 텔레비전을 통해 돈 많은 부모 밑에서 버릇없이 자란 젊은 여자가 부모 돈을 펑펑 써대는 걸 봐야 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그나마 이해하기 쉬운 건 시청자들입니다. 아까 이유가 뭐가 있냐고 그랬지만, 남들이 돈 쓰는 걸 보는 건 은근히 재미있거든요. 평범한 사람들이 할리우드 스타나 유럽 왕족의 호사스러운 삶에 열광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 대신 돈을 쓰는 거예요. 우린 직접 돈을 내지도 않고 나중에 그 물건들을 감당하는 귀찮은 짓을 하지도 않으면서 그들의 사치를 간접적으로 즐깁니다.
부잣집 버릇없는 딸의 철없는 바보짓거리를 보는 재미도 생각만큼 나쁘지는 않습니다. 남이 돈 쓰는 걸 보여주면서 그들을 정당하게 조롱하고 멸시할 수 있거든요. 니콜 키드먼이나 톰 크루즈의 사치를 조롱하는 것보다 명성도 없고 미모도 떨어지며 업적도 없는 중간급 평민들을 놀려대는 게 훨씬 쉽죠.
진짜로 이해가 되지 않는 건 그런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프로그램의 원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몰랐을 리가 없어요.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는 걸요. 이들은 전국적인 놀림거리가 되려고 작정하고 텔레비전에 출연합니다. 텔레비전에 출연하기 이전에 특별히 나쁜 삶을 산 것도 아닌데도 말이죠.
이게 우리가 쉽게 이해 못하는 텔레비전의 한 단면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치터스]와 같은 프로그램에서 배우자의 등을 치는 현장이 들통 난 진짜 악당으로 출연하고 싶겠어요? 그런데도 [치터스]에서 그들은 대부분 얼굴을 가리지 않고 그대로 출연합니다. [제리 스프링어 쇼]에 등장해 전국의 시청자들이 보는 앞에서 서로를 치고받는 사람들은 어떤가요?
물론 이런 프로그램들보다 경계선이 불분명한 프로그램들이 더 많습니다. [도전, 슈퍼 모델]이나 [프로젝트 런웨이]와 같은 경쟁 프로그램에서도 출연자들은 종종 시청자들의 조롱이나 미움을 받지만 바로 그 목적 때문에 출연하지는 않죠. 그들에겐 목표가 있고 그 목표를 추구하는 동안 자신의 매력이나 단점, 영리함과 어리석음이 노출되는 것뿐입니다. [도전, 슈퍼 모델] 1시즌의 로빈이 미움받고 멸시받으려 작정하고 그렇게 못되게 굴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 사람은 늘 하던 대로 했을 뿐입니다.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그 못된 면을 이용한 건 로빈이 아니라 타이라 뱅크스와 제작진입니다.
하지만 [대디's 스포일드 리틀 걸]에서는 빠져나갈 구석이 없습니다. 그들에게도 목적은 있겠습니다. 아빠를 꼬셔서 인도 여행을 갈 비용을 얻는다, 배우로 성공하게 할리우드로 갈 수 있게 아빠를 설득한다. 하지만 아무리 이런 목표를 내세워도 그들의 진짜 목적이 전국민의 놀림감이 되는 것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아니, 전세계죠. 지구 반대편에 사는 저도 그들을 보고 웃어대고 있으니까요.
그 이유는 설명될 수 있을까요? 네, 관점을 어디에서 잡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들은 그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해 바보짓을 해서 잠시나마 유명해집니다. 시청자들이 그들을 멸시하거나 조롱해도 상관없어요. 그렇게 해서 유명해지고 15분만이라도 시청자들의 기억에 남는다면 그들은 승자이고 시청자들은 패자입니다. 텔레비전 화면에 등장할 때 그들은 자신의 이름과 자신의 얼굴을 가진 주체입니다. 하지만 그들을 놀려대고 조롱하고 가끔 부러워하는 사람들은 수천만 명의 얼굴 없는 흐릿한 무리에 불과하죠. 그들은 그 프로그램에 출연함으로써 확실하게 지구상에 자신의 존재를 남긴 것입니다. 그 뒤에 평생 동안 아빠 돈을 쓰다 아무 업적 없이 늙어죽어도 그들의 묘지엔 이런 문장이 새겨질 수 있겠죠. ‘쓸모없이 살다가 쓸모없이 죽었지만 그래도 젊었을 때 [대디’s 스포일드 리틀 걸]에 출연했음.‘
우리는 그냥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몇 천 년 전까지만 해도 예전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었어요. 우린 결혼해서 자식을 만들고 그러는 동안 일을 해서 먹고 살만한 돈을 벌다가 죽었습니다.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몇몇 운 좋은 권력자들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시대엔 개인의 영향이 훨씬 커졌습니다. 재능 없고 멍청해도, 작정하고 미친 것처럼 굴면 혼자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도 있어요. 그렇다면 그런 유혹에 빠지는 사람이 없는 게 오히려 이상한 현상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가장 극적으로 이름을 남기려면 테러리스트가 되어 유명한 지형지물을 폭탄으로 날려버리는 것이겠지만, 바보 같은 컨셉의 텔레비전에 출연해 전국적인 놀림감이 되어도 생각보다는 나쁘지 않은 성취를 거둘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게 괜히 멀쩡한 비행기를 몰고 멀쩡한 건물을 들이박는 것보다 건전하고 좋은 일이죠. (06/09/08)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142 | 24 (2001- ) [26] | DJUNA | 2010.03.17 | 11745 |
141 | C.S.I. (2000- ) [21] | DJUNA | 2010.03.14 | 12070 |
140 | SF라는 명칭 [16] | DJUNA | 2010.03.13 | 9532 |
139 | [마지막 잎새]와 보스턴 결혼 [190] | DJUNA | 2010.02.05 | 12535 |
138 | [바람의 화원]을 연극으로 각색하기 [24] | DJUNA | 2010.03.21 | 9373 |
137 | [위험한 초대], [릴레이 만장일치], [공포의 쿵쿵따] [2] | DJUNA | 2010.03.20 | 7002 |
136 | [해피 투게더]와 [전파견문록] [24] | DJUNA | 2010.03.20 | 8836 |
135 | 가우디 애프터눈 Gaudí Afternoon (1991) [219] | DJUNA | 2010.03.17 | 10982 |
134 | 가짜 여자 정원사 La Finta Giardiniera (2007) [1] | DJUNA | 2010.03.20 | 7511 |
133 | 거미와 파리 The Spider and the Fly (2002) [28] | DJUNA | 2010.03.20 | 9649 |
132 | 거울 속의 네안데르탈인 [1] | DJUNA | 2010.02.05 | 7870 |
131 | 거침없이 하이킥 (2007) [1] | DJUNA | 2010.03.21 | 12084 |
130 | 고스트와치 Ghostwatch (1992) [1] | DJUNA | 2010.03.20 | 8673 |
129 | 골드바흐의 추측 (사람들이 미쳤다고 말한 외로운 수학 천재 이야기) Uncle Petors and Goldbach's Conjecture (1992) [1] [1] | DJUNA | 2010.03.13 | 7719 |
128 | 괴물들이 사는 나라 Where the Wild Things Are (1963) [3] | DJUNA | 2010.02.11 | 10080 |
127 | 그들이 사는 세상 (2008) [1] | DJUNA | 2010.03.21 | 10059 |
126 | 그저 바라보다가 (2009) | DJUNA | 2010.03.21 | 10309 |